[메디칼럼] 제1차 세계대전과 의학 /박지욱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18-12-09 19:05:18
| 본지 25면

염상섭의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에는 ‘구주대전(九州大戰)’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유럽의 큰 전쟁이란 뜻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말한다. 소설 속 인물은 인류가 겪은 최악의 구주대전이 인류 ‘최후의 전쟁’일 것이라 단언했다(하지만 20년 후 더 끔찍한 전쟁이 들이닥쳤다).

지난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종전 100주년이었다. 1914~18년, 유럽에서 시작한 이 전쟁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퍼져나갔고 북미와 대양주의 젊은이들까지 끌어들였다. 명실상부한 5대륙의 전쟁 즉, 세계대전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은 빠른 속도로 진화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전쟁이 과학과 기술 발전을 촉진했고, 과학과 기술은 전쟁의 풍경을 바꿨다. 대표적인 게 항공기술이다. 비행기의 경우 초기에는 나약한 존재였지만 말기에는 강력한 살상무기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지상전은 풍경이 반대였다. 초기 기동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퇴행적인 참호전이 됐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자리에서 무려 4년을 버텼다. 한 번씩 내려진 돌격명령은 병사들을 참호 밖으로 몰아내 기관총의 총알받이가 되도록 했다. 중간지대에 쓰러진 병사들의 현장 즉사율은 30%에도 못 미쳤고 부상병들은 다른 시신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병사들도 참호 속에서 절대 편할 수 없었다. 참호라 불렀지만 사실상 진흙 구덩이였다. 벨기에와 프랑스 전선은 저지대라 땅을 파면 물이 올라왔고, 겨울비로 진창이 되었다. 군화와 양말은 마를 새가 없어 겨울에는 발이 얼었다. 갈아 신을 양말과 부츠는 부족했기에 전투가 끝나면 죽은 병사의 부츠를 벗겨왔다.

병사들이 의식주를 해결하고 배설하고 죽는 참호는 말할 수 없이 지저분했다. 피 오물 토사물 배설물 쓰레기가 지천이었다. 비가 오면 둥둥 떠다닐 정도였다. 멀쩡한 병사들도 그 속에서는 전염성 황달이나 발진 티푸스에 걸렸다. 이따금 참호 속으로 독가스가 스멀스멀 기어왔고 박격포탄이 비처럼 떨어졌다.

이 생지옥 속에서 현대의학이 잉태된 것은 놀라운 소식이다. 마리 퀴리는 X선 촬영 차량을 손수 운전하며 전선을 누볐다. 그 덕분에 의사들은 몸 속에 박힌 파편을 재빨리 확인해 제거했다. 외과의사 카렐은 부상병들의 지저분한 상처 조직을 미리 잘라내는 수술법을 개발해 생존율을 높였다. 란트 슈타이너가 발견한 ABO식 혈액형과 항응고제 덕분에 부상병들이 전선에서 수혈도 받았다. 전선에서 응급 처치를 받은 후 부상병들이 야전병원으로 후송되는 체계도 마련됐다. 헤밍웨이는 구급차 운전수로 일하며 미래의 소설을 구상했다.

참호 속에서 생각 없이 머리를 내밀면 기다렸다는 듯 적의 총탄이 날아왔다. 머리만 다친 부상병이 많은 것도 이 전쟁의 특징이었다. 외과의사 쿠싱은 4개월 만에 219명을 뇌수술했다. 뇌 수술 후 사망률을 30% 이하로 낮추는 기적을 만들었다.

그는 이후 ‘현대 신경외과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얼굴 손상도 많았다. 이비인후과 의사 길리스는 5000명 이상의 얼굴을 수술로 새로 만들었다. 그 역시 ‘현대 성형외과학의 아버지’로 이름을 떨쳤다. 전쟁이 과학기술은 물론이고 의학 발전을 이끌어낸 것은 이렇게 상식이 되었다.

인류는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4000만 명, 2차 세계대전에서는 그 두 배의 목숨을 잃었다. 만약 제3차 세계대전이 오면 어떨까.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마지막 전쟁일 것이라는 점이다. 지구나 인류 문명, 둘 중 하나는 사라질 것이 분명하니까.

양차 대전을 겪은 후 유럽 국가들은 적을 용서했고 철조망도 걷어냈다. 과거도 중요하지만 다시는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민간인들을 폐허의 잿더미로 내몰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 유럽은 평화와 공영의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