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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에세이] 볏짚으로 채워진 축구공 /김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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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12-06 19:16:31
  •  |  본지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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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 뭉게구름을 밀어낸 찬바람이 대문 밖에 서성인다. 겨울이 왔음을 알리는 12월이다. 겨울이면 밤새 내린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어릴 때 고향집 앞 정경이 그립다. 아무도 밟지 않은 들녘에 쌓인 눈은 아침 햇살에 눈이 시릴 만큼 반짝였다.
아침을 준비했던 어머니가 가족 걱정에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마당을 쓸어 버렸지만 뒤뜰의 장독대 위엔 밤새 내린 눈이 그대로였다. 외양간 누런 암소도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아침 인사를 한다. 날씨는 차가워도 흰 눈 내린 날은 포근했고, 집 앞의 논과 밭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해가 동쪽 산봉우리를 훌쩍 넘어 중천으로 향할 무렵 동네 아이들은 마을 앞 눈 덮인 논으로 모여들었다. 두세 살 터울의 아이들이 모이면 축구 경기가 충분할 정도였다.

모여든 아이들은 무엇을 할까 고민도 하지 않았다. 이웃의 아이 옆구리에 들려진 바람 빠진 공을 보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누군가 너덜너덜한 터진 공 속에 지푸라기를 욱여넣어 채웠다. 공 모양이 되살아났다. 모여든 아이들은 두 팀으로 나눠 경기를 시작했다. 짚으로 채워진 공은 탄성을 잃어 멀리 차려고 애를 써도 잘 날아가지 않았다. 아마도 공이 터지지 않았다면 공 주우러 다니는 시간이 축구하는 시간보다 더 길었을 것이다. 그래서 좁은 논에 축구하기엔 짚으로 채운 터진 공이 아주 딱 이었다.

경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공 속에 들어있던 지푸라기는 아이들에 밟히고 차여 점점 다져졌고, 녹아내린 눈으로 젖어들었다. 공은 점점 무거워졌고 차는 발도 아팠다. 발을 떠난 공은 코앞의 상대 발 앞에 떨어졌다. 금세 서로 아이들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축구 경기가 아니라 마치 럭비 경기 같았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을 하얀 입김으로 토해낸 아이들의 이마는 땀으로 얼룩졌다.

몇 번의 밀치고 밀리는 공격과 수비 진영이 바뀌는 횟수가 반복될수록 눈에 덮였던 벼 밑동이 드러났다. 벼 밑동은 아이들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것도 잠시, 아이들은 드러난 벼 밑동에 익숙해졌고 더 이상 넘어지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점점 지쳐갈 무렵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올랐다. 신발은 고무신이라 공을 찰 때마다 벗겨져 뒤꿈치가 해진 양말도 이미 젖어 있었다. 속에 입은 내복은 땀으로, 겉옷은 논바닥의 진흙으로 얼룩졌다. 집에 가면 야단맞을 걱정이 들 무렵 우리 모두는 지쳐갔다.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었고 눈에 젖은 양말은 발을 시리게 했다. 땀이 밴 속옷은 바람의 한기를 느끼게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함께했던 동네 아이들 모두 그랬다. 집으로 가면 되련만 누군가 근처에 볏짚과 깻잎대를 들고 와 논 구석에 불을 놓았다. 아이들은 볏짚과 깻잎대가 불에 타는 따듯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시린 발을 녹이려고 신발을 벗고 한쪽 발을 들어 불에 가까이 댔다. 해진 나일론 양말의 구멍은 더 커졌지만 시린 발은 뜨거운 불에 조금씩 녹일 수 있었다. 이렇게 시린 발을 녹이면서 짚으로 채워진 축구공에 빠졌던 내 시선은 마을로 향했다. 여자 아이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다. 여자 애들 옆엔 둥글게 겹쳐진 커다란 눈 뭉치가 여러 개 보였다. 눈사람이었다.
우리가 축구에 정신을 잃었을 때 여자 애들은 눈사람을 만든 것이었다. 눈 내린 시골 마을은 축구를 좋아했던 남자 아이들만의 공간은 아니었다. 수줍음 많던 여자 애들에게도 신나는 겨울철 놀이터였다. 올겨울엔 꿈속에서라도 굴뚝에 저녁 연기가 피어오를 때까지 놀이터의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인제대 스포츠헬스케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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