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39대 대통령인 지미 카터를 바라보는 자국인들의 시각은 대체로 싸늘한 편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현실정치에 구현하고자 애썼으나 그다지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전 대통령에 비해 유약하다는 인상이 강했던 까닭에 차기 선거에서는 ‘강한 미국’을 내세운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지고 말았다. 그래서 후세 역사가들은 그를 ‘역대 최악의 미국 대통령’ 목록에 끼워넣기도 한다.

그러나 반전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세운 ‘카터 재단’을 바탕으로 인권 신장과 국제 분쟁 조정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었다. 전 세계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해비타트 운동의 일환인 ‘지미 카터 워크 프로젝트’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2002년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재임 때보다 퇴임 이후가 더 빛나는 미국 대통령’이라는 칭찬이 따라붙었다.

카터 대통령이 현직에 있던 1977년부터 1981년은 한반도 역시 격동의 시기였다. 남북관계는 경색됐고 특히 한미관계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양국 간 갈등은 미국 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들고 나오면서 시작됐다. 당연히 한국 측의 반발이 거셌다. 우리 정부는 군사력 보강책 없이 미군이 철수한다면 곧 북한의 도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항변했다. 1970년대 북한의 전력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꽤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다. 얼마 전 사단법인 한미클럽이 입수한 다수의 미국 외교 기밀문서를 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9년 6월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때 이 문제를 두고 카터 전 대통령과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기밀문서에서 더 눈길을 끄는 대목은 미국 정부가 남과 북, 미국 수뇌부 간 만남을 추진했다는 사실이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79년 한국을 방문할 즈음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3자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극비리에 밀어붙였다. 나중에 당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회동 장소를 제공하기로 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니 계획은 상당히 진행됐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의 제안에 떨떠름한 태도를 드러내면서 3자 고위급 회담은 무산됐다.

카터 전 대통령이 한시도 대미 적개심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던 북한과 접촉을 시도한 배경에는 도덕을 앞세운 그의 인권외교가 깔려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국가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치·군사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보다 도덕적 접근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퇴임 이후 한참이 흐른 뒤인 1994년 평양에서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나 북미대화 재개 등을 논의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구상이 좌절된 지 40년 만에 한반도에서는 남·북·미 3자 고위급 회담 개최 움직임이 다시 일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종전선언과 완전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남북과 미국의 정상이 만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는 점을 그동안 여러 차례 강조했다. 북미 간 2차 정상회담이 열리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이뤄진다면 이제 남은 일정은 3자 정상회담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 4월과 5월, 9월에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과 6월 북미정상회담 때만 해도 빠른 시일 내 도출되리라 예상했던 한반도 평화정착 방안은 해를 넘길 가능성이 커졌다. 북한이 속도조절에 나서는 모양새를 보이면서 남북, 북미 간 관계는 일단 숨 고르기 국면에 돌입한 감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여러 주변 상황을 고려하면 이 같은 ‘정중동’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물론 1979년의 카터 전 대통령과 2018년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소속 정당 만큼이나 성향도 눈에 띄게 다르다. 당연히 북한과의 접촉 이유도 내심 차이가 있을 법하다. 카터 전 대통령이 내세웠던 인권외교를 ‘미국 우선주의’를 줄기차게 표방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요구한다는 건 애초부터 무리다. 또 아직은 3자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도 없다. 그렇지만 3자 정상회담이 한반도 비핵화를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터다.

문득 카터 전 대통령이 1979년 기획했던 3자 고위급 회담이 예정대로 열렸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에 ‘만약’이란 단어를 갖다 붙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기는 하나 한반도 내 평화 정착 과정이 조금 더 빨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 나아가 상호 군축까지 진행됐다면 북한의 필사적인 핵무기 개발 시도를 억제했을 수도 있었다. 문 대통령의 3자 정상회담 추진이 이번 만큼은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이런 아쉬움 때문이 아닐는지.

논설위원 haorem@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