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한파가 몰아치던 1997년 12월의 일이다. 당시 여야 정당은 국회에서 의원 세비 30% 인상, 4급 보좌관 1명 증원을 뼈대로 한 관계법안을 슬그머니 통과시켰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적 분노가 들끓었다. 국회의원들이 경제난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하다는 비난이었다.
성난 민심이 작용한 듯, 그 이듬해 국내에서는 정치권 구조조정 목소리가 거세졌다. IMF 사태의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299명의 국회의원 정수도 대폭 줄여야 한다는 거였다. 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여론조사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200명선(64.6%), 250명 선(19.3%)으로의 정수 축소 응답이 절대다수를 이뤘다. 정치권은 미적거리다 결국 2000년 16대 국회의원 수를 273명으로 낮췄다. 이후 2004년 총선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299명으로 되돌려놨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회의원 정수(현재 300명) 조정이 논란이다. 국회 특위의 선거제도 개혁 추진과 맞물려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우선 대표성과 비례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모이는 분위기다. 승자 독식구조인 현행 선거방식은 ‘사표’가 양산되고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해서다. 그간 선거의 정당 득표율이 국회 의석 점유율과 비슷하기는커녕 심각한 괴리를 보였던 게 그 증거다. 그래서 연동형 혹은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유력한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국회의원 수 확대 문제가 뒤따르는데, 반대 의견이 만만찮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정수 확대에 반대하는 응답이 59.9%이고, 찬성은 34%에 그쳤다. 3년 전 여론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의원 정수 확대 반대 57.6%, 찬성 27.3%)가 나온 바 있다. 이는 20년 전의 의원 수 대폭 축소 민심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만큼 국회에 대한 국민적 불신감이 뿌리 깊다는 얘기다.
사실 우리나라는 전체 인구수로 대비하면 국회의원 수가 적다. 2015년 보고서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의 의원 1인당 인구수는 평균 9만9400명이나, 한국은 16만7400명으로 최하위권이다. 그러나 단순히 인구비례만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인구수 대비 국회의원 정수를 OECD 평균치에 맞추려면 514명이 돼야 하고, 단원제 국가 평균에 대입하면 802명이란 계산이 나오니 말이다. 이를 받아들일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알다시피 우리 국회의원들의 세비는 OECD 최상위권 수준이다. 1인당 GDP의 5.27배로 OECD 국가 중 3위다. 그에 비해 법안 발의·처리 건수 등 각종 평가지표와 설문조사를 통한 ‘보수 대비 의회 효과’ 면에서는 비교 가능한 27개국 가운데 26위이니 낯이 뜨겁다. 돈을 두둑이 받고 200개 상당의 특권마저 누리면서 밥값은 제대로 안 하는 꼴이다. 이런 지경에서 국회의원 정수를 늘린다는 게 유권자들에게 좋게 보일 리가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의원 정수 확대에 대체로 긍정적 입장이다.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국회의 이해 조정 기능을 향상시키고, 장기적으로 정치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등의 이유다. 그렇다고 해도 관건은 역시 국민 설득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비 등 국회예산을 획기적으로 감축하고 각종 혜택과 특권을 전면적으로 내려놔야 한다. 예컨대 유럽 국가에서는 의원 두세 명당 비서가 1명이고 의원 전용차도 없다. 반면 우리는 의원 1명에게 들어가는 비용만 보좌진 8명의 보수 등을 모두 합쳐 연간 7억 원에 이른다. 이런 고비용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의원 수 확대는 국민적 공감을 얻기가 어렵다.
국회의원 정수 조정 문제는 총선을 앞둔 시기마다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해 거의 빠짐없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대부분은 여야 간 당리당략과 밀실 협상 등에 의해 이뤄졌다. 국민 의견 수렴은 늘 뒷전이었다. 이번에도 그럴 조짐이다. 각자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차기 총선의 셈법이 도사려 있다. 정수 확대에 반대하는 진영은 국민정서를 거론하지만 속내는 기득권 지키기 의도라는 인상이 짙다. 정수 확대를 찬성하는 쪽은 밥값 잘하는 의원이 늘면 국민에게 그만큼 이득이라는 주장이나, 세력 확장 의도가 다분하다. 의원 수만 키운다고 국회가 잘 돌아갈지도 의문스럽다.
한 나라의 적정한 국회의원 수는 모범답안이 없고, 산정방법에 왕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랜 정치 문화적 전통과 국민적 동의 아래 결정되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의원 정수는 주권자인 국민이 부여하는 ‘정치성적표’나 마찬가지다. 정치권이 의원 수를 늘리려면, 무엇보다 국민 신뢰와 올바른 정치부터 회복하는 게 순리다. 아울러 공론의 장을 마련해 의견 수렴과정을 밟는 게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다.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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