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하지 못한 과거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사상 첫 법관 탄핵 결의로 치달은 작금의 우리 사법부 사태에서 확인하는 진실이다. 이번 사태에는 법원과 법관의 독립성 확보를 둘러싼 숱한 저항과 좌절의 기억이 데자뷔로 겹쳐진다.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19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제1차 사법파동’이다.
1971년 7월, 서울지검 공안부가 반공법 위반 사건의 증인 신문을 위해 제주도로 출장 간 서울형사지법 판사 3명에 대해 변호인 측으로부터 여비와 숙박비 등을 받았다며 구속영장을 청구한 게 그 발단이다. 유신 쿠데타를 준비 중이던 박정희 정권의 ‘사법부 길들이기’였다. 당시 서울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였던 유태흥 전 대법원장은 이 영장을 기각했다. 이어 전국의 법관 150명이 “검찰의 영장 청구는 시국사건에서 잇따라 무죄를 선고한 법원에 대한 보복 조치”라며 사법권 수호를 결의한 뒤 일제히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 저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거기에는 유 판사를 비롯해 한때 개혁 대열에 섰던 법관들의 변신과 투항이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1972년 10월,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 3월 법관 재임용 때 전체 법관의 10%가 넘는 48명의 법복을 벗겼다. 반면 서울형사지법원장, 대법원 판사로 승승장구한 유 판사는 1981년 대법원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렇게 ‘정치판사’가 탄생하면서 사법부 독립은 헌법 조항에만 존재하는 장식이 되어 갔다.
비극은 비극을 부르는 법. ‘유태흥 사법부’는 ‘제2차 사법파동’을 야기했다. 유 전 대법원장은 1985년 불법시위 혐의로 즉결심판에 넘겨진 대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인천지법 판사를 지방으로 쫓아냈다. 이를 비판한 글을 언론에 기고한 판사도 지방으로 전보 발령했다. 인사권을 무기 삼은 ‘법관 길들이기’였다. 판사들은 거세게 반발했고,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은 국회에서 유 전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여당의 반대로 탄핵안이 부결되면서 사법부 독립은 또다시 물거품이 됐다.
이런 연쇄 비극은 2009년 신영철 전 대법관에 대한 탄핵 시도를 낳았다. 신 전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으로 재직했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관련 재판 8건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자 야당이 탄핵안을 발의한 것이다. 국민의 67.5%가 탄핵안에 찬성하고, 전국 9개 법원의 법관들이 신 전 대법관의 사퇴를 요구했지만 여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탄핵안은 가결되지 못했다. 거듭된 사법부 독립 실패는 결국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 농단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사법부만이 아니라 국민을 대신해 선출되지 않은 사법권력에 대한 견제 역할을 맡은 국회의 책임도 크다. 헌법에 법원의 독립성(제101조)과 법관의 독립성(제103조)을 규정한 건 국민의 공정한 재판 향유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사법부 독립 자체가 견제를 불허하는 지고의 가치일 수는 없다.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이나 1, 2차 사법파동처럼 정권과의 재판 거래나 재판 개입 등을 통해 사법부의 독립성이 훼손됐을 땐 마땅히 국회는 헌법에 명시된 탄핵소추권(제65조)을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법부의 독립성이 확보될 수 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 농단에 연루된 법관들의 탄핵소추에 대해 “삼권 분립과 사법부 독립을 해치는 행위”라며 반대하고 있다. 신 전 대법관에 대한 탄핵안 발의 때도 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치적 입지만 바뀌었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다. 심지어 “사법 농단은 없었다”는 반응까지 나온다. 앞선 사법부 독립 실패의 악몽이 어른거린다.
이번에도 탄핵소추가 무산되면, 사법부 독립의 시계는 다시 50년 전 1차 사법파동 때로 돌아간다. 사법 농단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국민의 기본권은 바람 앞 등불처럼 흔들릴 것이다. 비극의 악순환이 아닐 수 없다. 그 비극은 사법부의 미흡한 자정능력이나 국회의 무책임에서도 기인하지만, 근원적인 한계는 국회에만 법관 탄핵소추권을 부여한 헌법에 있다. 사법권 독립의 일환으로 법관의 신분을 보장하는 한편, 법관에 대한 국민의 탄핵권을 인정한 일본 헌법과 대조적이다. 일본은 1948년부터 2007년까지 국민의 법관 탄핵소추 청구건수가 89만4243건에 이른다. 이런 과정을 통해 7명의 법관이 탄핵됐다.
진짜 비극은 비극의 원인을 알고서도 그 사슬을 못 끊는 것이다. 더는 국회의 불충실한 민의 대변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확보하려면 법관에 대한 탄핵소추권 부여 대상을 국민으로 확대하는 개헌이 필요하다. 일본 사법 제도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이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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