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사이에 있다. 아침 저녁은 겨울이지만 낮엔 가을이 완연하여 덜 여문 추위가 햇살에 사그라지곤 한다. 가을의 빈 공간 속으로 겨울이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이다. 가을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겨울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시기. 11월이다.
확실치 않음은 일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아침부터 어떤 옷을 입고 나갈지 고민이다. 덜 두꺼운 옷을 입자니 아침 저녁으로 추위가 매섭고, 두툼한 외투를 걸쳤더니 땀이 날 때도 있다.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나섰던 산책길에 오들오들 떤 적도 있다.
혼란스럽긴 해도 때때로 모호함은 다채로움의 근원이다. 지난 폭염 땐 줄곧 시원한 곳만 찾아 헤매었다. 살아 있다는 기쁨은 오로지 에어컨 밑에서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11월의 애매한 날씨는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감을 얻는 방법을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아침에는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도 기분 좋게 하루가 시작되고, 낮에는 부드러운 햇살에서 여유도 느낀다. 해질 무렵 기분이 좋을 만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일도 작은 행복이다. 제법 쌀쌀해지는 저녁에는 뜨뜻한 국물에 소주 한 잔이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준다. 여러 방법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11월이 선사하는 축복이다.
부산은 11월을 닮았다. 근대와 현대라는 시간의 사이에, 자연미와 인공미의 사이에, 동남쪽 끝 변방이지만 대양으로 가는 시작점이라는 모순 사이에, 무질서한 공간들과 계획된 장소들이 뒤섞인 사이에 부산이 있다. 그래서 부산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도시다. 시대를 관통하는 도시의 정체성도 모호하고,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어 혼잡하기도 하다.
그 덕분에 부산은 다양한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아침에 산을 올랐다가, 낮에는 강을 거슬러 저녁에는 바다로 갈 수 있다. 100년 전의 시간을 헤매다가 다가올 미래가 그려진 첨단의 시대를 엿볼 수 있도 있다. 도시 곳곳을 아침 저녁 시간의 변화에 따라, 계절의 변화에 따라, 높고 낮은 시점의 변화에 따라 살펴보다 보면 여러 형태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부산 공간은 11월이라는 글자모양처럼 남해 쪽으로 뻗어내린 거대한 산자락과 낙동강·수영강이 길쭉하게 갈라놓은 형국인데, 각각의 권역마다 풍광이 다르다. 동부산권은 바다와 강에 기대 마천루들이 병풍처럼 솟아올라 있다. 현대적인 화려함을 보여주지만 유토피아인 듯, 디스토피아인 듯 혼종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무질서하고 복잡다단한 도심부도 흥미롭다. 근대의 흔적들이 산자락과 매축지 위로 곳곳에 있어 도시의 질곡을 보여준다. 중앙대로나 복개된 하천을 따라 중구에서 금정구 쪽으로 가다 보면 도시의 발전과 번영의 역사가 압축적으로 펼쳐진다. 자연성이 빼어난 서부산권은 최근 신도시들이 발 빠르게 조성되고 있지만 여전히 넓게 펼쳐지는 평야와 강을 따라 자연이 빚은 생태계의 장관이 남아 있다.
최근 남구도서관에서 길 위의 인문학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플랜비문화예술협동조합이 그동안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수영동과 영도 대평동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참가자들과 현장답사도 했다. 부산항대교 덕분에 조선 시대 좌수영성지에서 근대 수리조선소의 발상지까지 몇 백 년의 시간을 30분 만에 이동할 수 있었다. 도시의 공간에 쌓이고 쌓인 시간의 사이를 통과하는 건 묘한 느낌을 주었다. 마지막 시간, 한 분은 평생을 부산에 살아왔지만 이런 곳들이 있는지 이번에 알았다며 도시가 가진 아름다움을 새삼 느꼈다고 하셨다.
일상생활에서 11월 부산의 다층적인 매력을 느껴보는 방법이 꽤 많다. 산복도로의 버스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 생긴 영도와 해운대를 오가는 1006번, 시간이 더 많다면 청강리에서 녹산공단을 오가는 1011번 버스를 타보면 굴곡 많은 해안선을 따라 부산의 역사를 볼 수 있다. 현재 부산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을숙도 현대미술관과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를 함께 가보면 자연과 도시가 빚어내는 대조되는 미(美)도 느껴볼 수 있다. 그런 저녁 퇴근하는 직장인들 사이를 지나 원도심의 골목에서 한 잔 한다면 2차는 광안리로 넘어가보자. 도심과 바다와 여행객들 사이를 오가며 술잔을 기울이는 일은 부산이라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다. 그러기에 딱 좋은 11월이다.
플랜비 문화예술협동조합 지식공유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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