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에게 ‘서리’는 주요 관심사항 중 하나였다. 주로 가을과 늦봄에 생기는 서리가 농작물에 크고 작은 피해를 입히는 까닭이다. 기상청의 한국 기상기록집(삼국사기·삼국유사로 본 기상·천문·지진 기록)에 따르면 서리는 자연재난 중 세 번째로 많으니 그럴 만하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서리 기록이 곳곳에 나온다. 예컨대 ‘세종 3년(1421년) 평안감사가 보고하되 8월 초부터 삭주(朔州) 등 12읍에 서리가 연일 내려서 만곡이 손상을 입었다’는 내용이다.

서리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지면이나 물체에 닿아서 얼어붙은 흰가루 모양의 얼음을 말한다. 늦가을에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는 ‘무서리’이고, 세게 내리는 것은 ‘된서리’라고 부른다. 그런 서리가 내리지 않는 무상(無霜)기간은 농업에서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작물 재배를 할 수 있는 기간과 밀접해서다. 가령 배꽃이 서리를 만나면 배 농사는 끝이고, 채소는 서리에 잎이 시들어 버릴 정도이니 서리의 발생 추이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흔히 서리에 무섭고 강하다는 뜻이 담긴 것도 여기에서 비롯됐지 싶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여자의 한에 비유할 만큼 서리는 매섭고 엄하다는 얘기다. ‘서리가 내리는 가을’인 추상(秋霜)이 추상같다(호령 따위가 위엄 있고 서슬 푸르다)는 표현으로 쓰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선 후기 첫서리 발생일의 평균치를 비교하면 19세기가 17세기 때보다 엿새 가량 늦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나왔다. 이번 한국기상학회 학술대회에서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발표하는 내용이다. 1623~1894년 승정원일기와 그 이후 1910년까지 다른 자료의 서리 관련 기록을 비교 분석한 결과다. 이 기간 서리 현상에 대한 글이 776건 발견됐고, 평균 첫 서리일은 10월 9.47일이었다고 한다. 옛 문헌을 통해서도 기후 변동과 온난화 경향이 새삼 뚜렷하게 확인된 셈이다.

그도 그렇지만, 옛 선현들은 중추의 계절에 지켜야 할 시령(時令)과 덕목을 추상의 엄격함에서 찾았다. 새벽 찬 공기를 가르는 서릿발에서 엄숙함과 공정함, 냉철함을 읽었다. 서리는 차갑고 피해를 주는 것이나, 그 속에 맑고 투명한 아름다움이 있어서다. 부정비리와 불공정 행위가 판을 치고 독직(瀆職) 사건이 횡행하는 요즘 세태에서 가을 서리의 미학을 한 번쯤 음미하는 것도 좋을 법하다.

구시영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