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동아대 석당미술관에서 열린 ‘서전병원(스웨덴적십자야전병원) 특별 사진전’에서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온 어느 연구원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스웨덴 엔지니어들에게 늘 기술 자문을 하는데 정작 두 나라의 역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사진을 통해서라도 알고 싶어 대전에서 당일치기로 왔다. 그는 “우리 국방 기술 중 핵심 기술은 미국보다 스웨덴에 더 의존하고 있다”는 ‘기밀’도 털어놓았다.
이역만리 스웨덴은 생각보다 가까운 이웃이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 스위스와 공동으로 판문점에서 남북의 군사 충돌을 막는 중립국감독위원회(NNSC) 활동을 하고 있다.
2016년 기준 스웨덴을 찾은 한국인은 5만 명인데 반해 1만7803명의 스웨덴인이 한국을 방문했다. 인구가 우리 5분의 1임을 감안하면 방문객이 한국의 배 수준이다.
한국과 스웨덴의 이런 끈끈함은 60여 년 전 스웨덴적십자야전병원에서 비롯됐다. 서전(瑞典)병원으로 더 익숙한 이 전시 야전병원은 1950년 9월부터 1957년 4월까지 6년 7개월간 부산의 서면과 남구(옛 수산대)에 주둔하며 유엔군, 국군, 민간인 외에도 중공군, 북한군 등 피아 없이 치료했다.
정전협정 이후 병원은 서면에서 남구 수산대학으로 옮겨 민간인 구호에 전념했다. 6년여 주둔 기간 의료진은 200만 명 이상을 무상 치료했다. 또 민간 의료 자원봉사자들은 부모를 잃은 수많은 고아를 품어 본국으로 데려갔다. 현재 스웨덴 내 입양 한인 규모는 1만 명을 넘는다. 한국 철수 직후에도 스웨덴은 같은 의료지원국인 노르웨이 덴마크와 공동으로 서울에 국립중앙의료원을 설립해 붕괴된 한국의 공공의료체계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스웨덴병원의 이런 놀라운 이야기는 우리의 무관심으로 60년 넘게 까맣게 잊혀 있다가, 두 해 전 남구청에 근무하는 필자에 의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스웨덴에서도 스웨덴병원을 다룬 다큐멘터리 ‘Let us not forget’이 제작되고 있다. 한국-스웨덴협회 라스 프리스크(Lars Frisk) 협회장은 2004~2006년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스웨덴 대표로 근무하면서 병원에 대해 알게 됐다. 현역 장군인 자신도 몰랐던 이 스토리를 반드시 스웨덴 국민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일념에 예편 후 다큐멘터리 제작에 뛰어들었다.
필자가 수소문 끝에 찾은 당시 병원에서 치료받은 한국인 환자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스웨덴 촬영팀이 지난해 이 무렵 남구를 방문했다. 60년 전 벽안의 의료진으로부터 두 번째 삶을 선물 받은 이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떠올리다 눈시울을 붉혔다. 촬영팀에 대신 큰절을 올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갚을 길 없는 은혜’로 혼절해 촬영팀이 가슴을 쓸어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가 한국과 스웨덴에서 전파를 타면 반향은 적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터키에 이어 또 다른 ‘형제국가의 탄생’도 기대된다. 다큐멘터리는 스웨덴어, 한국어, 영어 3개 버전으로 준비 중이다.
그런데 당초 지난 9월 완성 예정이던 다큐멘터리가 아무 소식이 없다. 10월 부산국제영화제 출품도 무산된데 이어 서울 시사회도 돌연 취소됐다. 속내를 알아보니 ‘돈’ 때문이다. 밀도 있는 인터뷰를 위해 스웨덴·한국 외에 미국, 프랑스 등 현지 로케이션을 가졌다 한다. 영화 한편 못지않은 제작비가 소요되는데 다큐멘터리는 사실상 프리스크 협회장이 사재를 털어 진행한 모양이다. 다큐 방영을 한국-스웨덴 수교 60주년인 내년으로 늦췄지만 장담하기 어렵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이다. 역사 재건은 기념관, 역사관 건립에만 있지 않다. 고증된 스토리는 역사가 되고 그 역사는 천년의 생명을 얻는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 어떤 기념비보다 깊게 마음을 파고 드는 법이다. 스웨덴병원은 우리의 역사이자 갚아야 할 은혜다.
현재 80명 남짓의 생존 의료진은 평균 나이 구순을 넘겼다. 다큐 완성이 늦어지면서 촬영에 참여한 일부가 다큐를 보기 전에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나무는 가만있고자 해도 바람이 그치질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는 말이 어찌 우리 부모에게만 국한될까. 은혜를 갚고자 해도 그들이 가만있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
‘서전병원 사진전’ 제안자·부산 남구청 구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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