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1762~1836)의 ‘하일대주(夏日對酒)’는 조선 후기 세도가의 횡포와 삼정 문란, 탐관의 폐해를 제대로 묘사한 명문이다. 오죽 세상이 혼탁했으면 대낮에 술잔을 기울이며 한탄조만 읊조렸을까 싶기도 하다. 문장 하나하나에 부조리한 시대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 중 세도가들만 중요 관직을 대대로 나눠먹으며 세상을 주무르는 실상을 통렬하게 비판한 대목이 나온다.

“위세도 당당한 수십가(數十家)에서 / 대대로 국록을 먹어치우더니 / 그들끼리 붕당이 나뉘어져서 / 엎치락뒤치락 죽이고 물고 뜯어 / 약한 놈 몸뚱이는 강한 놈 밥이라 / 대여섯 호문(豪門)이 살아남아서 / 이들만이 경상(卿相) 되고 / 이들만이 악목(岳牧) 되고 / 이들만이 후설(喉舌) 되고 / 이들만이 이목(耳目) 되고 / 이들만이 백관(百官) 되고 / 이들만이 옥사(獄事)를 감독하네.”

인재 등용문이던 과거(科擧)가 엄연히 존재했지만, 다산의 시대에는 이미 공정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대리시험, ‘족보’ 베끼기, 채점자 매수하기 등 갖은 부정한 방법이 동원되면서 타락은 극에 달했다. 다산이 특히 통탄한 것은 특정 정치세력과 세도가들의 독과점이다. 대를 잇는 권력 세습 수단으로 변질된 과거의 실상을 고발한 것이다.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의 책 ‘조선의 뒷골목 풍경’에 다산이 세태를 꼬집은 부분이 실려 있다. “명문 거족 자제들은 아예 공부하려 하지 않는다. 시(豕) 자와 해(亥) 자도 분별하지 못하는 젖내 나는 세도가의 어린애가 장원을 차지하기 일쑤다.”

조선 후기 과거제도의 변질과 권력 세습의 실상은 오늘날의 현실과도 별로 다르지 않아보인다. 가장 안정적인 일자리로 통하는 공공기관의 ‘고용 세습’ 행태와 겹쳐지기 때문이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서울교통공사의 정규직 전환자 가운데 임직원의 친·인척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고용 세습 논란이 뜨겁다. 보수 야당은 국정조사까지 요구하고 나선 마당이다. 부정한 고용 세습은 마땅히 근절해야 할 사회악임에 분명하다. 방치한다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국민적 공분을 불식시켜야 한다. 하나 명심할 것도 있다.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부정’ 낙인을 찍어선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불공정한 특혜와 불법행위 여부다. 아버지가 다니는 공기업에 자녀가 취업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옥석을 가리는 일이 먼저다.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