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가을이다. 해 질 무렵, 산책할 겸 해서 뒷산에 오르니 감과 밤이 지천이다. 비닐봉지나 그릇을 미처 준비 못 해, 그놈들을 대충 호주머니와 손에 담고 집으로 돌아오니 한 바가지나 된다. 아직 설익은 감이지만 아이들과 선 채로 먹고, 밤은 불 땔 때 화목보일러에 넣어 구워 먹을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기쁘다. 역시 가을은 높고 푸른 하늘과 누렇게 익은 벼 그리고 청아한 바람으로 농심(農心)이나 시심(詩心)은 매한가지로 풍성하다.

올해만 해도 내가 사는 산골에 귀촌을 희망하는 지인 둘이 찾아왔다. 그중 한 명은 시골에서 먼저 살아본 경험자를 만나 어떻게 사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왔다던 중학교 동창 A였다. 그는 마침 내가 사는 산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진주에 직장이 생겨 혼자 생활하고 있었고,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부산에서 각각 직장과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먼저 시골에 정착한 후, 기반이 잡히면 가족을 불러 함께 살 계획으로 나와 몇 차례 땅과 살 집을 보러 다녔다.

그러나 처음엔 꽤 희망적이었던 그의 계획은 갈수록 빛이 바래졌다. 그새 이 지역의 땅값은 오를 대로 올랐고 그가 마음에 들어 한 전원주택은 턱도 없이, 가격이 비싸 그는 슬그머니 포기하고 말았다.

시골에 들어오고 정착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을 비로소 깨달은 그와 달리 또 다른 한 명은 나의 막내 처남이었다. 처남은 경북 문경의 모 대안학교 교사였는데, 그 학교가 경제적인 이유로 도시로 이전하게 되자, 그는 그게 원래의 설립 취지에 벗어났다고 판단하여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지금이야 밝히지만, 대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하여 독일 유학까지 마친 그가 월 150만 원도 채 되지 않은 급여를 받는 조건으로 그 학교에 들어갈 때만 해도 우리는 그가 몇 달 못 버티고 나올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그는 학교에서 진정과 열성으로 학생들을 잘 가르쳤고 교사로서의 보람과 행복을 만끽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사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여자와 결혼까지 하고 이제 두 돌이 된 아이도 있다. 결혼 전에 지금은 처남댁이 된 그녀에게 장모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말 괜찮겠나”라고 한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장모님의 생각으로는 처남댁이 대기업을 은퇴한 아버지와 고등학교 교사를 한 어머님의 맏딸로 지방국립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재원이어서, 아무리 생각해도 아들의 배필이 되기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에 처남은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술을 마시며 자신의 진로에 대해 걱정했다. 그 자리에서 난 그때 그가 독일에 유학 갈 때처럼 “사람은 누구나 그 자리를 떠날 때가 있다. 그럴 때 과감하게 떠나는 게 순리다”고 비슷한 충고와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시골에 살지만 한집의 가장으로서, 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할 일도 많았고 신경 쓸 때가 제법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추석 연휴 때였다. 추석 당일에 서울에 사는 형님댁을 다녀오고 난 뒤, 부랴부랴 다음날 처가가 있는 부산에 와보니, 처남은 자신의 처가인 광양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와 처남댁의 햇볕에 까맣게 탄 얼굴을 본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새 그들은 전북, 장수의 한 외딴 마을로 들어갔다고 했다. 학교를 그만둘 때 마음 맞는 동료 교사 세 가정과 마을 회관을 빌려 생활하며 이듬해에 있을 농촌체험학교를 준비 중인데, 그 사이에 생활비가 필요해서 양파 캐기 등 농촌일용직으로 일하느라 얼굴이 탔다며 환하게 웃었다. 옆에 있던 처남댁이 “시골에서 버는 게 학교보다 솔솔찮게 돈이 된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러면서 서둘러 자신의 장인과 장모에게 줄 선물을 챙기며 차에 오른 그의 모습을 보니, 몇 년 전 시골에 들어왔던 내 모습이 겹치면서 나는 가슴이 먹먹했지만, 한편으로 시골에서 참행복을 일구어내는 그들이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그런데 그때, 내 뒤에 서 있던 장모님의 혼잣말이 날 아득하게 만들었다.

“새 빠지게 벌어 대학원까지 공부시켜 놓았더니, 딸이나 아들이나 모조리 시골 촌구석에나 들어 가버리고…, 에고!”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