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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칼럼] 잘 죽는 법 /한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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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10-21 19:27:24
  •  |  본지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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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는다’는 명제(命題)는 너무나 당연하다. 광대한 대륙을 통일한 중국의 황제도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약을 구할 수 없었고,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도 영원한 아름다움을 가지지 못했다. 필자는 어린 시절 등굣길에서 만난 샛노란 병아리, 유년 시절을 함께했던 강아지와 고양이들로부터 처음 ‘죽음’이라는 것과 만났다. 포근한 체취를 가졌던 외할머니의 자궁 속에도, 젊은 어머니의 약한 심장 속에도 죽음은 자궁암, 심부전이라는 이름으로 내 주변에 가깝게 있었다. 그런 기억들이 너무 두려웠던 탓일까? 몇 년째 애완견을 키우자는 아이들의 요구를 아직도 번번이 거절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는 1969년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이라는 책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의 기전’을 처음 발표했다.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으로 이어지는 기전은 의료인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내용으로, 2008년 민주당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에게 패배한 힐러리 클린턴의 심경이나, 탄핵 이후 재판을 받는 박근혜의 심리 등 여러 상황을 풍자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올해 2월부터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환자의 권위 있는 죽음에 대한 고민보다는 이 법안이 시행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의료분쟁을 방지하는 데 세미나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필자의 관심도 역시 그랬다. 이 법의 시발점이 된 속칭 ‘보라매병원 사건’, ‘김 씨 할머니 사건’으로 불리는 의료분쟁의 판결은 의사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이제서야 존엄사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해 아직까지도 개정안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품위 있는 죽음’을 50년 전, 미리 바라본 로스 박사의 선견(先見)은 놀랍기만 하다.

최근 재출간된 ‘죽음과 죽어감’을 다시 정독하면서, 그동안 흉부외과 의사로 살아오며 ‘잃었던’ 수많은 환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호흡기에 의존해 있으면서 마지막으로 딸기가 먹고 싶다고 손가락 글씨를 쓰던 여학생…. 전신의 근육이 발끝부터 서서히 마비되는데 마지막까지 의식은 또렷했던 루게릭병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악몽의 가위눌림’이라고 표현했던 조용한 절규…. 맥주의 시원한 목 넘김을 꼭 한 번만 더 느껴보고 싶다던 식도암 할아버지…. 내가 최선이라 믿었던 당시의 의료행위들이 환자나 가족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 지나치게 개입하여 그들의 판단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닌가? 만약 그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면 로스 박사처럼 철저하게 환자의 인격과 존엄이 바탕이 된 결정이었던가? 환자의 마지막 목소리, 가족들의 마음을 얼마나 들어주고 이해하였던가? 질문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기대수명(2015년 기준)은 82.1년이다. 영국 의학저널 ‘랜싯’에 실린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서에서는 2030년에 태어나는 한국 여성의 기대수명은 90.82살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건강수명은 73.2세로 기대수명과의 격차인 약 9년 동안은 아픈 상태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즉, ‘죽어감’의 시기인 것이다. 언젠가 맞닥뜨릴 세상과 이별을 하는 순간에 나 자신과 남겨질 가족들이 좀 더 수월하게 ‘수용의 단계’ 혹은 ‘점진적 초탈(decathexis)’에 도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해야겠다. ‘죽어감의 언어’를 이해하고 어떤 메시지를 남길 것인지 미리 고민해두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 모두에서 집요하게 남아있는 것은 바로 ‘희망’이라는 사실을 긴 여행을 떠나는 그때도 꼭 기억하고 싶다. ‘잘 죽는 법’을 고민하다 보니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도 명확해졌다. 참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다.

부산백병원 흉부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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