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피아골 대피소에서 며칠 동안 지내고 있습니다. 대피소를 관리하시는 분이 아랫동네에 일이 생겨 가야만 하는데 그렇다고 대피소를 비울 수 없다면서 어렵게 그리고 간곡하게 하는 부탁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간단한 짐을 꾸려 올라갔습니다. 지리산 피아골은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며 지리산 10경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곳이기도 합니다.

계곡 초입부터 가을의 느낌은 성큼 다가옵니다. 올가을 유난히 잦은 비로 인해서 계곡물은 기세 좋게 흘러내리고 이미 물들었거나 이제 물들 준비 중인 나뭇잎들과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물소리는 힘이 넘치는 음악과 같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는 그 음악에 심취해서 온몸에 힘을 빼고 그 장단에 맞춰 몸을 흔들며 무념인 듯합니다. 나무는 앞으로 다가올 자신의 몸 변화에는 이미 다 알고 있고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고 또 자신을 성장시키는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듯 아예 도통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나무 하나하나의 색깔뿐만 아니라 산 전체의 색깔도 차츰 바뀌고 있습니다. 눈길을 산 위로 돌리면 그곳은 이미 화려합니다. 연두, 노랑, 주황, 빨강, 자주, 보라, 청록 등 참 다양한 색깔입니다. 나뭇잎은 태어날 때도 자기만의 색깔로 세상을 만나고 떨어질 때도 자기만의 고유한 색깔을 고집합니다. 자연이 또 하나 시킨 공부입니다. 직접 보고 직접 느끼고 직접 확인해서 얻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공부입니다.

아름다운 풍광과 웅장한 물소리를 들으며 올라가는 길은 과히 선경이라 할 만하고 역시 피아골 계곡이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단풍의 질이라고 할까? 차원이 다릅니다. 순전히 그날 나의 느낌이기는 하지만. 나뭇잎은 가지 끝에서부터 물이 들기 시작하는데 저 끝, 기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잔가지의 끝은 그래서 더 빨리 더 붉게 물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닥치면 발끝 손끝부터 혈액을 안 보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세히 살펴보면 그 세월 동안 비바람에 찢기고 벌레에 먹히고 알지 못하는 병에 걸리고 굽고 말라서 시들고 상처투성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고귀해 보입니다. 나무처럼 늙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확인합니다.

그동안 오랜 세월 한자리에서 당당하게 품위 있게 세월을 보내는 고목을 보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는데 나뭇잎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처음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은 노(老) 병(病) 사(死)를 피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늙더라도 병이 들더라도 저렇게 품위 있게 저렇게 당당하게 또 저렇게 아름답게, 정말 그렇게 나이를 들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드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을 하직할 때도 낙엽처럼 그냥 뚝! 그렇게.

좁은 계곡에는 햇볕이 머무는 시간도 잠깐이라 그 짧은 동안이라도 좀 더 많은 햇살을 만나고자 저마다 양 끝 키를 키우고자 하늘을 향한 수많은 각자의 개성을 만나는 재미도 그만이지만 빛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반짝이는 그 찬란한 빛의 향연이라니, 절정으로 치닫는 단풍의 그 우아함이라니, 잔치인 것입니다. 생애의 마지막 잔치, 내년을 기약하는 잔치.

짧은 산길을 길게 늘려서 길을 아끼며 천천히 도착한 대피소는 그러나 적막합니다. 평일의 늦은 오후 산장에는 ‘우~우’하며 바람만 지나가며 마른 나뭇잎만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조금 이르다고는 하나 명색이 지리산 피아골인데, 단풍의 시절인데 개미 새끼 하나 없다니. 평소에도 피아골 대피소는 아랫동네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이용객이 별로 없다고 했지만 계절이 가을인데, 하는 혼자만의 의아함이 들었습니다.

산장 주변은 단풍나무를 비롯한 온갖 나무가 가을옷으로 갈아입는 중인데 왜 감탄사는 탄식조로 나오는지. 와! 와!가 아닌 아이고! 또는 와이고! 로 나오는지? 홀로 궁금해하며 웃습니다.

산장 주변의 하늘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을 만큼 좁기도 하거니와 산의 밤은 빨리도 오는지라 금세 어두움이 몰려오고 이제 밝았을 때의 풍광은 어둠이 삼켜버리고 세찬 계곡물 소리와 바람소리뿐, 그리고 작은 마름모꼴 하늘에 희미한 초승달이 보입니다.

세상의 빛은 어디에도 없는 완벽한 어둠. 그리고 추워진 날씨 탓에 풀벌레 소리마저 없는 밤. 곧 소등을 하고 들어가면 완벽한 적막이 기다릴 것입니다. 요즘같이 밝고 시끄러운 세상에 완벽한 어둠과 완벽한 적막이라니. 이 시간이 축복입니다.

산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