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학생들과 함께 동아리 활동으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다시 읽었다. 외국 문학 전공자도 아닌 내가 베트남어 중국어 일본어 판본을 갖고 있을 정도이니, 이 책에 대한 독자의 관심은 가히 세계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어린왕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은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은 듯하다.
책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유년시절 청소년용 번안 텍스트로 접한 경험이 많은데, ‘어린왕자’를 그림동화로 기억하는 독자가 적지 않은 것이 그 방증이다. 실제로, 동화적 성격이 강하고 작가가 그린 삽화도 수록되어 있지만, 이 책의 장르는 엄연히 소설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번역본을 고르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왕자’의 한국어 번역이본(異本)은 100여 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화든, 소설이든, 외국문학도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번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번역은 단순히 타국의 언어를 본국의 언어로 대체하거나 교환하는 과정이 아니다. 어떤 외국어도 모국어와 등가관계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말의 의미와 미감에 부합하는 어휘나 문장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번역의 기술(art)’은 언어와 언어 사이의 간극을 조리 있게 매개하는 어법의 적용만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마음과 사상을 충실히 감지하고 독해하는 일이다. 그래서 번역은 이국적 어휘를 타인의 문자 속에 이관하거나 기입하는 작업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해석 행위’이다. 도무지 완결할 수 없는 ‘번역의 잉여치’를 두고 종종 논쟁과 토론이 벌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번역가는 비평의 임무를 함께 수행한다. 좋은 역자(譯者)가 적지 않지만,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이 특히 돋보이는 이유이다.
두 달 전에 타계한 그는 저명한 불문학자이자 번역가이며, 또 문학평론가이다. 대중독자에게는 ‘밤이 선생이다’를 비롯한 인문에세이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기실 그는 비평가이자 번역가이다. 지난달 재독(再讀)한 선생의 ‘어린왕자’ 번역은 어찌나 말끔한지, 학생들과 약속한 분량을 훌쩍 넘겨 읽었을 정도이다. 또 아이들은 이미 ‘어린왕자’의 내용을 직감할 수 있기에,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른을 위해 해제를 썼다는 선생의 위트 넘치는 ‘작품해설’에서 대가의 풍모와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약간의 비유가 허락된다면, 서술자 ‘나’와 ‘어린왕자’의 만남과 대화는 일종의 번역 행위로 볼 수 있다. 어른들은 주인공 ‘나’가 그린 보아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규범화되어 있는 지식(“산수, 문법”)만을 강조할 뿐,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는 관심이 없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는 기존의 학술적 성과가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기성세대의 시각은 언제나 수치화되거나 정량화된 방식(“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으로 인간 삶을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와 ‘어른’이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B612에서 온 어린왕자는 다르다. 그는 유일하게 ‘나’의 그림을 투시할 수 있는 역자이다.
어린왕자가 지구로 오기 전에 방문한 소행성의 내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씩 나열해 보면, 왕은 비합리적인 권력의 위계적 속성을, 허영쟁이는 자기 성찰이 결여된 무비판적 자아를, 술꾼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현실도피적 태도를, 사업가는 이유도 모른 채 숫자를 증식하고 있는 자본의 축장구조를, 가로등 켜는 사람은 관료주의의 병폐를, 지리학자는 지식의 관념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한 어른’들이 사는 여섯 행성에 대한 순례는 ‘나’와 ‘어린왕자’의 공통 감각을 형성한다. 이는 구성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서사전략이다. 그러나 어린왕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내내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낯선 타자와의 대화는 여러 차례 어긋나고 튕겨 나가며, 번역될 수 없는 방언의 회담처럼 결렬된다.
어쩌면 선문답처럼 해석하기 힘든 대화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번역의 역량인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말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 속에 담긴 외로움을 감지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나’와 ‘어린왕자’가 그러했듯이, 각자 다른 행성에서 온 이의 말에도 귀 기울이는 것이 번역가의 사명이자 윤리이다. 그러므로 번역은 국경과 인종을 넘어 ‘보편적 삶’을 정초하는 위대한 의사소통 행위이다. 국가나 대학에서 번역(학)의 가치를 홀대하고 박대한다고 하더라도, 좋은 번역을 위한 노력이 좌초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무더웠던 여름, 동시대의 번역가 중 한 분이 하늘로 떠났다. 스스로 별이 된 선생은 이제 어떤 희망을 옮겨 적고 있을까. 깊어가는 가을, 황량한 세상을 버티게 할 오아시스 같은 문장이 있기에, 조금은 ‘덜 나쁜 어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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