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도시 사이에 들판이 있다. 며칠 사이에 들판의 색은 완연한 노랑이다. 짙은 노랑이다. 흔히들 황금들판이라 표현하는 그 노랑이다. 집에서 내려다보는 나무들도 점점 브라운과 옐로 사이, 거기에 약간의 레드가 더해진다. 내가 주로 다니는 반경 내외는 어쨌든 가을은 노랑이 대세다. 그러는 사이 다른 정보가 끼어든다. 요즘 뜨는 핑크뮬리 그라스라는 식물. 제주도며 경주며 관광지들을 온통 핑크 핑크하게 물들이는 식물이다. 간단히 핑크뮬리라고도 한다. 호기심이 동해서 한번 찾아가 볼까나 생각해본다. 가을의 노랑에 핑크가 가세했다.

추자도를 다룬 방송프로그램을 우연히 본다. 큰 섬 두 개와 작은 섬 수십 개가 떠 있는 가을 바다가 쨍하게 푸르다. 깊으면서 맑다. 아, 어쩌면 가을은 블루인가….

멸꽃이 피었다며 수선거리며 가을 멸치를 맞으러 바다로 나가는 뱃사람들, 바다가 내어준 멸치며 조기를 소금 쳐서 염장을 하고 꼼꼼히 엮어 멸치젓과 굴비를 만드는 나이든 여인네들, 어른 손바닥만 한 홍합과 전복을 캐내는 해녀들, 잊을 수 없는 손맛을 찾아 모여드는 낚시꾼들. 추자는 이 모든 사람을 품고 있다. 봉글레산에서 내려다보는 추자군도의 수려함도 좋지만 물질로 수확한 갯것들을 굽고 지지고 무쳐서 차린 맛난 밥상을 보니 갑자기 추자에 가고 싶어진다.

추자도(楸子島)는 남편의 고향이다. 초등학교 때 떠나와서 목포에서 조금 살다가 부산으로 왔단다. 사람들은 때때로 “까까머리 섬 소년이 엄청 출세했네, 부산까지 오고”라며 놀린다. 처음엔 그런가 했지만 살다 보니 그게 무슨 출세인가 싶어진다. 프로그램 내용 중에 한 남자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자신은 낚시가 좋아 그냥 섬에 들어왔는데 집도 사고 배도 사고 아내도 얻고, 이만하면 출세했다며 웃는다. 뭍에서 아등바등 살아도 집 사는 일 하나도 어려운데 그이는 정말 출세를 했다. 문밖만 나서면 그 좋아하는 낚시를 계속하면서 집과 배에 아내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십 년도 전에 아이들과 함께 추자를 간 적이 있다. 남편은 낚시를 하러 몇 번인가 다녀왔지만 아이들은 처음 가는 아빠의 고향이 몇 시간이나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외딴 섬이라는 것에 꽤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그전에는 그저 낚시가 끝나면 떠나기 바빴던 남편도 섬의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옛날이야기들을 들춰냈다. 집이 추자초등학교 신양분교와 맞닿아 있었다며 학교엘 가서 여기는 옛날 집터, 이곳은 무슨 나무가 커다랗게 서 있던 자리, 여기 쪽문을 지나 학교 선생님들이 밥을 먹으러 왔었다며 아이들과 함께 추억놀이를 했다. 시어머님의 음식 솜씨는 옛날부터 대단하셔서 학교 선생님이며 면서기 등등이 어머님의 손맛을 입이 마르도록 칭송을 했다고 하는데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티브이를 보면서 이미 떠나신 지 오래인 어머님의 밥상이 매우 그리워졌으니까.

추자도에 있는 동안 육촌 누님의 집에 머물렀는데 지금 얼굴은 잘 생각이 나질 않는데 참소라 무침이며 갓 잡아 올린 삼치를 저민 회며 오랫동안 혀끝에 머물며 잡아당기던 누님의 손맛으로 기억은 남는다. 얼마 전에 불현듯 생각이 미쳐 전화를 해보니 그 누님네도 섬을 떠났다가 누님이 몸이 몹시 안 좋아져서 다시 섬으로 들어가셨단다. 고향에서 여생을 정리하는 모습이 괜찮은 이별인 듯싶다.

마침 생각난 김에 검색을 해보니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꼼꼼하게 데려다줄 마을버스가 다닌다. 게다가 추자올레도 생겼다. 요즘은 어디든 올레길이라 이름 붙여 걷는 일을 장려하니 천천히 걸어서 한 바퀴, 마을버스에 흔들리면서 한 바퀴. 그러다 보면 맑고 고요한 가을 바다 위에 떠 있는 4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이 눈에 가득 차겠지. 그리고 어디든 오래된 식당에 들어가는 거지. 멸치회 무침과 각종 해초, 추자도 굴비구이 등등 가을 바다가 내어준 갯것들로 한 상 차려진 그 밥상 앞에 앉으면 마음이 푸근해지겠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손가락 쪽쪽 빨며 굴비 한 마리 발라먹다 보면 마른 몸에 물이 차오르고 피돌기가 시원해지겠지. 빨리 밥 한 그릇 먹으러 가야겠다.

그런데, 막상 휴대전화 일정표를 보니 빼곡하게 들어찬 칸들이 무겁다. 가을은 그냥 달려가 버릴 것 같음.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