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최초의 단편영화들이 파리의 극장 소유주들에게 비공개로 시연되는 저녁이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은 그랑 카페에서의 공개 시연회 하루 전이었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공장에서 나오는 근로자들, 잔디에 물을 뿌리는 정원사 등 일상의 모습이 화면에 재연되는 순간이었다. 사진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시네마토그래프, 즉 카메라와 영사기의 기능이 합쳐진 장치 덕분이었다.
그날 저녁 움직이는 영상에 단번에 매료된 한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술사이자 마술극장을 소유한 조르주 멜리에스였다. 9년 동안 마술극장을 운영하면서 새로운 마술을 고안하고 또 볼거리 넘치는 공연을 기획해 온 그의 눈에 움직이는 영상은 또 다른 가능성이었다. 상영이 끝난 후 멜리에스는 곧바로 뤼미에르 형제에게 1만 프랑을 내걸고 시네마토그래프 구매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자신들이 발명한 기계의 과학적 속성을 설파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뤼미에르 형제는 판매 제의를 거절한다.
멜리에스는 수소문 끝에 영국에서 만든 애니마토그래프 영사기와 단편영화 몇 편을 구입하여 자신의 극장에서 마술 공연 도중 영화를 상영하였다. 기계 다루는 일에 능숙하였던 멜리에스는 급기야 영사기를 필름 카메라로 개조한 후 직접 영화를 찍기에 이른다. 또한 오늘날의 스튜디오에 해당하는 촬영소까지 세워 다양한 영화를 제작하였다. 기획부터 각본, 감독, 무대미술, 특수효과에 이르기까지 멜리에스의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영화에 ‘연출’의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1896년부터 1913년 파산하기까지 그가 제작한 영화는 500여 편에 이르렀다.
그 중 멜리에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달나라 여행’(1902)이다.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1865)를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은 14분여에 이르는 흑백 필름으로, 유인로켓을 만들어 달에 쏘아 보내고 또 달에서 외계인들을 만나 도망치는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영화의 압권은 달에 점점 가까이 가는 로켓이 달의 왼쪽 눈에 푹 박히는 장면이다.
멜리에스는 현실을 ‘기록’해서 재생한 뤼미에르 형제의 단편영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야기’와 ‘환상’의 세계를 그리고 싶어했다.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황홀한 눈속임의 마술처럼, 그는 영화에서 현실을 뛰어넘는 매혹적인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지닌 촬영과 편집의 속성은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세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영화 사상 최초로 연출과 환상의 요소를 도입한 멜리에스가 뤼미에르 형제의 기여를 훨씬 더 뛰어넘는 이유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2011년 3D 영화 ‘휴고(Hugo)’는 바로 조르주 멜리에스에게 바치는 따뜻한 오마주이다. 주지하다시피 스콜세지 감독은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좋은 친구들’ 등 주로 미국 리얼리즘 시네마를 연출해 온 거장이다. 그가 노년에 들어 동화와 같은 3D 영화를 연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는 1930년대 초 파리 기차역을 배경으로 어린 소년 휴고와 그의 아버지를 연결하는 자동인형, 그리고 그 자동인형을 만든 초라한 장난감 가게 주인 조르주 멜리에스의 이야기가 중심에 놓인다. 실제로도 멜리에스는 영화 촬영소 파산 후 노년에 들어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지냈다. 스콜세지는 원작 동화를 처음 접했을 때 주인공 휴고에게서 어린 시절 영화광이었던 자신의 모습과 13세 때 극장에서 처음 보았던 멜리에스의 ‘달나라 여행’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고 한다.
영화의 말미,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멜리에스가 다시 사람들 앞에 선다. 뒤이어 그가 활동하던 시절의 실제 영상과 그의 작품들이 소개되며 무대 위 멜리에스에게 뒤늦은 갈채가 쏟아진다. 이는 노년의 거장 스콜세지가 조르주 멜리에스라는 위대한 예술가에게 표하는 경의이자 영화적인 환상의 세계에 보내는 갈채이다. 나아가 멜리에스가 다양한 특수효과와 편집 기법을 통해 기발한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냈듯이 21세기의 스콜세지 감독 또한 3D라는 첨단기법을 통해 영화의 표현 영역을 확장시켰다.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제임스 카메론 등이 그러하였듯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한창이다. 최근 몇 년간 힘겨운 시간을 보냈지만 부산국제영화제는 다시 정상화 원년의 기치 아래 새롭게 출발하고 있다. 이야기와 이미지로써 영화라는 환상적인 직물을 짜는 그들이야말로 조르주 멜리에스의 후예들이다. 또한 그들이 만든 영화를 보며 새로운 꿈을 꾸는 이들이야말로 미래의 멜리에스이다.
동서대 영어학과 교수·민석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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