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미국 주간지 타임이 1985년도 올해의 인물로 덩샤오핑을 선정할 때 함께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덩의 흑묘백묘론이다. 중국을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만든 개혁개방 노선을 대변하는 말이지만 덩샤오핑이 처음 말한 사람은 아니다. 중일전쟁의 전장에서 참모장 덩샤오핑이 모신 사령관 류보청(劉伯承) 장군이 입에 달고 다닌 말이라는데, 류는 덩과 마찬가지로 쓰촨 출신이다. 쓰촨에는 “노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속담이 있었다.
고양이 때문에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때 자본주의 반동으로 몰려 숙청당한 경험이 있다. 그런 덩을 마오쩌뚱은 자신이 죽기 전에 부총리로 복귀시키는데, 마오의 속내가 개혁개방과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국 현대사학계의 견해이다.
개혁개방의 디자이너 덩이라면 몰라도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국민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발상이 마오에게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강한 인상 탓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마오 생전에 더뎠던 자본 유입 속도가 덩의 시대에 빨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개발주의와 급진주의 사이의 갈등 여부나 정치 지형의 차이 탓이 중요하겠지만 구호의 발신과 수신 여부가 마오와 덩의 성패를 갈랐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마오의 구호, 으뜸은 실사구시(實事求是)다. 국내에선 성공했을지 몰라도 무척 번역하기 힘든 마오의 고전어는 해외 발신에 실패한다. 실사구시와 의미가 같은 덩의 고양이는 달랐다. 세계, 특히 자본주의 최강국 시민인 미국인 귀에 쏙 들게 옮길 수 있는 속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외국 자본의 유입이라는 결과는 덩의 발신 방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덩의 고양이가 미국에서 성공한 이유는 식민지로 출발한 문화 열등국 최초로 해외 발신에 성공한 미국 철학, 프래그머티즘에서 유래를 찾는 것이 옳지 싶다. 찰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등이 대표하는 프래그머티즘은 실용주의라고도 부르는데, 사람마다 정의는 달라도 그들이 가장 크게 생각한 진리 문제에서 프래그머티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진리 판단의 기준은 실천의 유용성’이라는 퍼스나 ‘진리 판단은 반드시 결과를 따져야 한다’는 제임스의 정의에서 말이다. 결과가 좋다면 다 좋다는 그들의 격언도 떠오르지만 덩의 고양이는 프래그머티즘 코드 덕분에 미국에서 잘 수신되었지 싶기도 하다.
멀리 중국과 미국을 돌아온 이유는 사실 오늘 우리가 겪는 역사적 과정의 말들이 그들의 커뮤니케이션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 탓이다. CVID, CVIG, CVIN, CVIP, PVID, CPD, CD, FFVD. 알 수 없는 암호의 배열 같은 이 말들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고, 주워섬기기조차 숨 가쁜 말 속에 혹시 장래 우리의 성패를 점칠 수 있는 실마리가 이미 그들 사이에 있지 않았나 싶어서다. 생소한 말이 태반이지만 그중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라는 미국말을 줄인 CVID는 이제 익숙해졌으니 기준으로 삼을 만하겠다. 조지 부시 1기 행정부에서 북한 핵문제를 다룰 원칙으로 수립한 원칙인 CVID는 들쭉날쭉한 나머지 주장에 변하지 않는 점 하나를 담고 있다. V, 곧 검증 가능해야(Verifiable) 한다는 것.
비핵화가 되었든 핵폐기가 되었든 결과를 담보할 V는 프래그머티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중요 개념인 검증화(verification)와 닿아 있는 것이지 싶다. “어떤 관념의 진리성은 그 관념에 내재된 붙박이 속성이 아니다. 그 관념이 진리로 나타난 것이다. 그 관념의 진리성은 실제로 하나의 사건 또는 하나의 과정, 곧 자신을 검증하는 검증화 과정이다.” 여기서 ‘그 관념’이란 말은 윌리엄 제임스가 염두에 두었던 기독교 신학의 신이라고 읽어도 되지만 오늘날 문맥에선 비핵화로 읽어도 될 것 같은 말이다.
부침을 되풀이하던 북미 대화가 성패를 가늠하기 힘든 데서 낙관적 전망으로 선회한 개인적 이유가 있다. 북한의 화법이 지난해와 달라졌다는 점 때문이다. 북한은 ‘신뢰 구축’이란 말을 들고 나왔고 그에 앞서 ‘행동 대 행동’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행동, 그리스어로 프라그마. 프래그머티즘의 어원이다. 그리고 신뢰. 북한은 지금 미국이 알아들을 수 있게 발신하는 중이다.
앞으로 있을 북한 핵무력에 대한 검증은 사실 블랙박스를 여는 것과 같은 일일 테고, 신의 존재 증명처럼 검증화 과정은 지난할 것이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북한의 신뢰 구축 주장은 바로 이것이지 싶다. 미국은 아마 덩샤오핑의 중국과 그랬던 것처럼 발신과 수신의 동일 지평이 나타난 상황이 기꺼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대화의 성공 자체는 낙관하게 되었다.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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