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완도로 가는 버스 길은 6시간이라는 주행 예정 시간을 무색하게 할 만큼 멀게 느껴진다. 잘못 탄 승객 때문에 출발이 지연되더니, 마산과 함안 사이의 두 개 터널에서는 2건의 추돌사고 여파로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순천터미널에서는 주유를 하느라 탑승할 승객을 태우는 것을 잊고 출발하려던 기사와 터미널 직원 사이에 실랑이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터미널에서 내려 장도의 청해진까지 걷는 길은 이런 일들을 금방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상쾌하다. 특히 신지도로 들어가는 다리 밑의 아담한 어촌 신기마을은 그 풍경 안에 잠기고 싶게 하고, 지나치며 나오는 큰길가의 집 담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탐스러운 보리수 열매는 눈으로만 보기에는 아쉬움을 자아내게 한다. 청해진 어린이공원 언덕길에서 참새 두 마리가 앞에서 폴폴 뛰며 서로 부리를 비벼대는 모습은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발굴 및 복원된 청해진유적지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 외성문을 향해 올라가니, 그 밑에 우물이 지붕을 이고 자리 잡고 있는데, 바닷물로 둘러싸인 조그만 섬의 우물에서 마실 물이 나왔다는 것을 신기해하며 내성문으로 올라간다. 판촉이라는, 돌로 쌓고 흙으로 덮는 성곽 기법에 대한 설명과 견본을 보며 고대에 오르니, 섬을 에워싸고 있는 바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섬은 바다 장벽으로 둘러싸인 감옥이 될 수도 있고, 배를 타고 사방으로 나갈 수 있는 전진기지가 될 수도 있다. 궁복=장보고는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간 불세출의 인물이었다. ‘궁파(弓巴)’ 또는 ‘궁복(弓福)’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천대 받는 섬사람으로 태어나 당나라로 건너가 병졸 천여 명을 거느린 ‘무령군 중군소장’이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물론 개방적인 당나라의 정책과 모병제로 바뀐 병력 충원 제도의 덕을 보기도 했지만.

장보고(張保皐)는 ‘백의의 동이 민족을 보호한다’는 뜻이라는데, 그의 이력이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황상석, ‘장보고의 글로벌 경영 혁명’). 해적에게 잡혀가 당나라에서 노예로 팔려가는 신라인의 모습을 보고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설진해 해적을 소탕하고, 이를 무역기지로 활용하여 당나라와 신라와 일본을 잇는 3국의 민간교역을 주도한다. 이슬람 상인이 지중해에서 홍해, 인도양을 거쳐 중국 동남해안의 양주에 하역한 물품을 장보고 상단이 인수하여 동중국해 사단항로를 통해 청해진을 거쳐 경주와 일본의 다자이후까지 운반하고 공급한다. 그 역의 과정도 장보고 상단이 독점한다.

장보고가 ‘해상왕’(최남선)이나 ‘해신’(최인호)으로 불린 것에는 명실상부한 이런 활약이 반영되어 있고, 신라 왕릉 앞에 이슬람인 형상의 비석이 서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에는 물론 당나라의 시박사 운영(세금을 내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게 함)과 교역품(예로 깨지기 쉽고 다량인 도자기와 같은)이 육상 교역에서 해상 교역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던 변화를 감지하고 이에 편승한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적들을 소탕하는 데만 진력하지 않고 그들의 항해 기술을 확보하고, 그들 중에서 능력을 가진 자를 받아들여 견당매물사와 대일회역사로 파견한다거나, 가야 쇠망 이후 백제인 고구려인 신라인 등으로 일본과 중국으로 이산(디아스포라)된 재일·재당 신라인 무역상의 유대를 구축하여 활용한다거나, 항상 생명의 위협에 놓인 이들의 안전 항해를 위해 관음 신앙의 사찰을 곳곳에 창건한다거나 하는 일련의 사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특히 현재 러시아 중국 일본 등에 이산된 동포들을 생각해보면).

장보고는 완도·장도에 설진하면서 대부분의 경우에서 보듯이 지명을 따서 ‘완도진’이나 ‘장도진’이라 하지 않고 왜 굳이 ‘청해진(淸海鎭)’이라 했을까? 바다를 오염시킨 해적을 소탕하여 ‘바다를 깨끗하게’ 하고 싶어서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 의지와 욕망을 신라 왕실까지 펼치고자 한 저의는 없었을까? 그래서 혼탁한 권력에 의해 앞서의 성취가 폄하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까?

군권과 경제력을 지닌 장보고가 김양과 더불어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추대하는 데 지대한 공로를 세웠지만, 자신의 딸을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만들고자 한 계획은 무산되면서 오히려 그것은 모두 김양의 차지가 되고, 자신은 그의 부하였던 염장에게 피살되는 불운을 맞는다. 청해진은 13년의 번영을 뒤로 하며 공도화되고, 주민은 김제 벽골제로 강제 이주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과욕의 업보였을까? 1996년 5월 31일, 청해진이 설진된 날이 ‘바다의날’로 지정되고, 8월 8일 ‘해양수산부’가 출범했다고 해서 그의 꿈이 실현된 것일까?

도보여행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