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산메디클럽

[세상읽기] 폐기되는 재벌개혁 /정선섭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8-12 20:34:40
  •  |  본지 26면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미국 경제사에서 1901년은 이정표가 되는 해다.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미국 경제를 주무르던 대기업과 전면전을 시작한 해였다. 당시 미국 대기업들은 철도, 에너지, 철강, 섬유, 식품 등 핵심 산업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부를 챙기고 있었다. 반면 국민은 고물가와 실업난, 저임금의 삼중고로 피폐한 상태였다. 대기업들은 정치 권력까지 좌우하면서 국가를 농단했다. 그런 대기업을 국민은 ‘강도귀족’이라 불렀다. 10년간 이어진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기업 개혁정책은 철도재벌 노던 시큐어리티, 석유재벌 스탠더드오일, 철강재벌 카네기철강 같은 거대 카르텔과 트러스트를 해체했다. 지상 최대 부호로 일컫던 록펠러, 밴더 필트, 카네기, 제이 굴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도 이때였다.

19세기 중반 탄생한 미국 대기업은 정경유착, 담합, 결탁을 통해 반세기 만에 난공불락의 금자탑을 세웠다. 하지만 부잣집 도련님 출신의 보수정당 공화당 소속이었던 루스벨트의 손에 최후를 맞을 줄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루스벨트의 승리는 여론, 사법부, 언론의 전폭적 지지 덕분이었다. 언론은 록펠러, 카네기, 벤더 빌트의 불법 거래와 탈세 의혹을 폭로했고, 사법부는 그들을 줄줄이 감옥으로 보냈다. 결국 대기업 최고 경영자는 모든 재산을 사회에 내놓고 경영에서 물러났다. 미국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록펠러재단, 하버드대학, 벤더필트대학은 그들이 내놓은 돈으로 만든 것들이다. 경제학자들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위대한 벤처기업이 탄생한 것은 미국 경제의 틀을 바꾼 루스벨트의 유산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재벌개혁이 화두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재벌개혁이 화두가 된 것은 처음은 아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반복된 국정의 목표였다. 기이한 것은 자본주의가 발전한 미국에서 10년 만에 매듭을 지었건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에선 70년 넘게 숙제로 남아 있는 점이다. 시작할 때는 용 머리였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뱀 꼬리보다 작아진 것이 재벌개혁이었다.

우리나라의 재벌개혁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재벌개혁의 정의와 목적이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재벌개혁의 필요성과 방법론이 모호하다는 말이다. 혹자는 대기업의 지배구조나 경영행태를 바꾸는 것이라 하고, 혹자는 재벌 해체라는 극단적 주장까지 편다. 그런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국민의 피부에 와 닿지는 않는다. 게다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벌개혁의 개념과 방법론이 다르니 국민은 혼란스러운 나머지 으레 반복되는 정치적 퍼포먼스로 여긴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나라 재벌이 지닌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우리나라 재벌은 소수 자본가가 주식이나 인적결합을 통해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콘체른 형태에 가깝다. 과거 미국 일본의 재벌들은 시장 독과점을 위해 동종 사업자끼리 결합해 형성된 카르텔이나 트러스트 형태였다. 따라서 미국 일본 재벌은 법과 제도를 통해 독과점 체제를 규제하면 개혁이 가능했다. 반면 우리 재벌을 개혁하려면 소유구조와 독과점 체제를 모두 손대야 한다. 독과점은 내부거래나 상권 보호로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소유구조의 개혁은 사유재산권과 충돌한다. 범법 재벌총수나 사회적 물의를 빚은 오너 가족이 사유재산권을 앞세워 경영에 참여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 사회적 계층갈등이 심화되면서 재벌개혁을 둘러싼 국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점도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경제적 절박감에 대한 개인별 온도 차가 크다 보니 국민 전체의 동의를 얻기가 어려운 것이다. 더욱이 재벌이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정치, 경제, 사회적 파워집단을 포획한 상황이라면 이를 넘기란 쉽지 않다.

재벌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목적과 방법을 명쾌하게 제시해 국민적 지지와 사회적 동의를 얻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섣부른 포퓰리즘은 일시적 환상을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긴 어렵다. 국민은 목적의 정당성과 현실적 필요성에 공감할 때 정치적 지지를 표시한다. 국민적 동의를 얻지 못하는 개혁정책은 미풍에 그칠 뿐이다. 광풍처럼 몰아쳤다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경제민주화처럼 말이다.

재벌닷컴 대표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건강한 부산을 위한 시민행동 프로젝트
많이 본 뉴스 RSS
  •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부울경 국회의원에 듣는다
민홍철 국방위원회 민주당 간사
부울경 국회의원에 듣는다
이채익 행안위 한국당 간사
강동수의 세설사설 [전체보기]
‘한반도 비핵화’ 탈출로 찾아내야 할 평양 정상회담
어른들은 모르는 방탄소년단의 ‘방탄’세상
강동진 칼럼 [전체보기]
활력이 넘치는 교토의 특별한 비밀
부산에 누워 있는 에펠탑이 있습니다
기고 [전체보기]
‘Going Together’ 캠페인으로 선진 정치문화를 /이대규
리차드 위트컴 장군과 세계시민정신 /강석환
기자수첩 [전체보기]
‘김지영 논란’ 유감 /이승륜
한국당 부산의원, 더 반성해야 /정옥재
김용석 칼럼 [전체보기]
생활 SOC: 천사도 디테일에 있다
한여름의 몽상: 부산의 다리들이 가리키는 ‘길’
김정현 칼럼 [전체보기]
‘미스터 션샤인’ 오해
통일 vs 평화공존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김경수·오거돈 선거공약 1호 운명은? /김희국
시, 독립투사 발굴 앞장서야 /유정환
도청도설 [전체보기]
폼페이오 추석 인사
백두에 선 남북 정상
문태준 칼럼 [전체보기]
고요한 물
폭서(暴暑)와 피서(避暑)
박무성 칼럼 [전체보기]
‘밥 한 공기 300원’의 미래
교육부가 만드는 ‘대학 살생부’
박창희 칼럼 [전체보기]
서부산 신도시,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설 [전체보기]
공급 확대로 선회한 주택정책, 지방은 뭔가
법원행정처 폐지 사법부 개혁의 시작일 뿐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국민연금 개혁, 공론조사가 필요하다
지금 ‘복지국가 뉴딜’이 필요하다
장재건 칼럼 [전체보기]
미친 집값과 서울 황폐화론
포스트 노회찬, 정의당만의 몫일까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