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감성터치] 인생의 덤을 찾아 나서며 /허소희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8-12 20:33:56
  •  |  본지 26면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이따금 서울로 출장을 간다. 부산으로 돌아올 때는 바로 기차를 탈 수 있도록 표를 예매하는 데 신경을 쓴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부산행 열차는 대개 15분마다 있지만, 조금도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 항상 서둘러 움직인다. 정신없이 뛰어도 무언가를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흡족하기만 하다.

그런데 지난 출장에서는 영등포에서 업무를 마친 터라, 서울역까지 가지 않고 조금 기다리더라도 영등포역에서 타기로 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천천히 걸어 역으로 갔다. 출발까지 아직도 1시간이나 남았다. 기차표 시간을 앞당길 수 있을까 알아봤지만, 부산행 열차는 하루 4편이 전부다. 그제서야 서울 한복판에서 간이역과 같은 이곳에 제 발로 걸어왔음을 깨달았다. 하는 수없이 대합실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대합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텔레비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였다.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연신 나오지만, 그저 눈으로 자막을 따라갔다. 그것도 지루해지면 대합실의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중에서 옆자리 아주머니가 가져온 파란색 보따리의 안쪽을 마음대로 상상했다. 여러 번 간장물을 부은 토실한 간장게장이 담겨 있을지,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문서가 뭉치째 들어 있을지. 비닐봉지에 넣어도 될 만한 흔한 물건은 아니지 싶었다.

그러다 기차역에서 가장 어울리는 행동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운 이름을 떠올리고 안부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끊임없이 사람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이곳에서 마땅한 일이니까. 쏟아지는 뉴스를 흘려보내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이기도 했다. 이어서 몇몇의 이름이 떠올랐다. 반가울 게 분명한 음성들이었지만, 차마 전화번호를 누를 순 없었다.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순간에서야 당신의 이름을 생각해냈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때가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었을까? 우리는 살면서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오면, 마치 너무 이르게 인생의 성적표를 받아든 사람처럼 허둥거린다. 일상의 틈이 벌어지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잠시 쉬기 위해 찾는 커피도 빨리 마시려고 얼음을 넣어 주문하며, 업무의 공백을 다른 업무로 채우는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또 갑자기 일상의 속도가 줄어들면 재빨리 무마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만다.

하지만 일상의 틈은 인생의 덤이다. 잠시 멈춰 서서 지금과는 다른 길을 내다볼 수 있게 하고, 먹고사는 것과는 조금 떨어진 세계를 그려볼 수 있게 한다. 느슨하게 벌어진 하루의 틈으로는 새로운 시간이 찾아올 수 있다. 그 시간이 요즘 나의 일상에 연달아 침투하고 있다. 그리고 빽빽한 일상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새벽 시간이다. 여름이 깊어지면서 동이 트기 전에 눈이 떠진다. 한여름은 저절로 나를 깨운다. 8월의 해는 탁구공처럼 하늘로 퉁겨져 오른다. 삽시간에 주위가 환해지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예쁘다’는 중얼거림이 튀어나오게 한다. 구름이 가득 껴도, 혹은 구름 한 점 없어도 해가 뜨는 하늘은 언제나 근사하다. 예전에는 한숨이라도 더 자는 게 남는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라는 걸 안다. 그야말로 인생의 덤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듣는 것도 인생의 덤이다. 회사 주변에 김밥 국수 김치국밥 따위를 파는 식당이 있는데, 그 식당에 자주 가는 것은 순전히 주인아주머니의 말 때문이다. “김밥은 남기면 싸줄 테니, 국수는 다 먹고 가” “저녁이니 일부러 김밥을 크게 말았어, 천천히 먹어”라는 그 말이 맛있어서 간다. 평범한 솜씨의 흔한 메뉴지만, 항상 잘 먹었다는 기분이 든다.
굳이 나누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풍경이 일상의 황량한 틈을 빼곡하게 채운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기차간에서 여러 질문을 떠올려 본다. 당연한 기쁨으로 받아들인 것들이 어쩌면 누군가 선뜻 보태준 인생의 덤은 아니었을지, 지금껏 귀중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곁에 두고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지. 이제 하나의 순간을 그려본다.

저마다의 보따리가 풀어져 일상의 틈을 가득 채우는 순간을, 언제든 반가운 목소리와 마주하는 순간을, 그리고 인생의 덤을 찾아 나서는 순간을.

미디토리 협동조합 팀장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건강한 부산을 위한 시민행동 프로젝트
많이 본 뉴스 RSS
  •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부울경 국회의원에 듣는다
민홍철 국방위원회 민주당 간사
부울경 국회의원에 듣는다
이채익 행안위 한국당 간사
강동수의 세설사설 [전체보기]
‘한반도 비핵화’ 탈출로 찾아내야 할 평양 정상회담
어른들은 모르는 방탄소년단의 ‘방탄’세상
강동진 칼럼 [전체보기]
활력이 넘치는 교토의 특별한 비밀
부산에 누워 있는 에펠탑이 있습니다
기고 [전체보기]
‘Going Together’ 캠페인으로 선진 정치문화를 /이대규
리차드 위트컴 장군과 세계시민정신 /강석환
기자수첩 [전체보기]
‘김지영 논란’ 유감 /이승륜
한국당 부산의원, 더 반성해야 /정옥재
김용석 칼럼 [전체보기]
생활 SOC: 천사도 디테일에 있다
한여름의 몽상: 부산의 다리들이 가리키는 ‘길’
김정현 칼럼 [전체보기]
‘미스터 션샤인’ 오해
통일 vs 평화공존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김경수·오거돈 선거공약 1호 운명은? /김희국
시, 독립투사 발굴 앞장서야 /유정환
도청도설 [전체보기]
폼페이오 추석 인사
백두에 선 남북 정상
문태준 칼럼 [전체보기]
고요한 물
폭서(暴暑)와 피서(避暑)
박무성 칼럼 [전체보기]
‘밥 한 공기 300원’의 미래
교육부가 만드는 ‘대학 살생부’
박창희 칼럼 [전체보기]
서부산 신도시,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설 [전체보기]
공급 확대로 선회한 주택정책, 지방은 뭔가
법원행정처 폐지 사법부 개혁의 시작일 뿐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국민연금 개혁, 공론조사가 필요하다
지금 ‘복지국가 뉴딜’이 필요하다
장재건 칼럼 [전체보기]
미친 집값과 서울 황폐화론
포스트 노회찬, 정의당만의 몫일까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