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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공론화의 그늘 /이경식

전국 각지 공론화 러시, 책임 회피 비판도 제기

세제 개혁에 17년 바친 세종 노력이 진짜 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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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공론화 공화국’이다. 적어도 2018년 8월은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듯하다. 정부든, 지방자치단체든 하나같이 공론화를 최선의 정책 결정 방법으로 여기고 있어서다. 지난해 실시한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재개 여부와 최근 끝난 2022학년도 대학입시안에 대한 공론화는 그 표본이다. 기획재정부의 규제 개혁, 청주 KTX 오송역의 명칭 변경 등 공론화 대열에 가세한 사안은 현재 10여 개에 이른다. 부산항 북항재개발지역 오페라하우스 건립 중단 여부와 부산 중앙버스전용차로제(BRT) 추가 건설 철회 여부도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공론화는 여론조사와 달리 참여 시민들에게 해당 사안을 심화 학습시킨 뒤 토론을 거쳐 의견을 수렴하는 숙의민주주의의 요체인 만큼 민의 존중 차원에서 반길 만한 일이다. 하지만 정작 그다지 흔쾌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입시안 공론화에서 드러났듯이, 정책 결정을 시민에게 떠넘기는 교육부의 무책임한 모습 탓이 크다. 세부 평가요소를 조합하기에 따라 입시안이 최대 3000여 개나 나올 수 있는 대입 제도는 전문가에게도 난해한 터라 시민 판단에 맡길 사안이 아니었다. 4개의 시나리오로 압축해도 경우의 수가 많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공론화의 창시자인 제임스 피시킨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도 두 달 전 우리나라를 방문해 “시나리오 방식으로는 개별 사안에 대한 입장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대학의 자율에 맡길 수도 있다는 선택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공론조사 결론을 그대로 정부 정책에 반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도 했다. 결국 예상대로 현행 대입 제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결론이 도출됐다. ‘공론(公論)’의 입구로 들어가 ‘공론(空論)’의 출구로 나온 셈이다. 그 사이 1년여의 금쪽 같은 시간이 덧없이 흘러갔다. 전문가들은 “공론화는 정책 결정의 참고자료로만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김상곤 교육부 장관은 “공론화를 통한 정책 결정은 우리 정부에 꼭 필요한 방식”이라며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부와 교복 등으로 공론화 대상을 확대 중이다. 시민이 교육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시민 교육부’나 다름없다.
부산시도 예외가 아니다. 시는 오페라하우스와 BRT를 공론화에 부치기로 하면서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을 그대로 수용할 것”이라고 했다. 민의를 충실히 반영하려는 건 권장할 만한 자세이지만, 뒤집어 보면 책임 회피로 해석될 소지도 있다. 오페라하우스를 공론화위에 넘기려는 사유를 보자. 시는 기능 중복과 과도한 운영비라고 한다. 오페라하우스는 부산시민공원에 건립하려는 부산국제아트센터와 내년 4월 문현금융단지에 들어서는 뮤지컬전용극장과 공연 기능이 겹친다. 시는 문화체육관광부에 오페라하우스에 대한 국비 지원을 요청했다가 국제아트센터와 중복 사업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기도 했다.

당초 계획대로 세 시설을 모두 지을 경우 관객은 분산되고, 운영비가 중복 투입되면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는 게 시의 판단이다. 시는 이미 그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 공론화위에 결정을 구하기 앞서 기능 중복과 운영적자 가능성을 예측하고서도 세 시설의 건립을 밀어붙인 공무원들의 안일한 일처리에 눈을 돌려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과정을 건너뛰고 공론화위에 오페라하우스를 회부한다면 137억 원의 투자금 등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려는 시도라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설치 필요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 BRT 역시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공론 군주’로 불리는 조선 세종의 공론정치를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피시킨 교수의 방식보다 더 민주적이고 현대적이어서다. 세종의 공론화 노력은 ‘세종실록’에 ‘더불어 의논한다(與議·여의)’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불합리한 세제를 개혁하기 위해 17년간 공론화를 진행했다. 관리가 직접 고을을 답사하며 세금을 매기고 걷었던 인정과세를 비리 여지가 적은 정액세로 바꾸는 일이었다. 세종은 ‘국가재정을 확충하되 백성의 고통은 줄인다’는 공론화 목표부터 설정한 뒤 17만2000명의 백성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어 7만4000명의 반대자를 상대로 집요한 설득 작업을 벌였다. 그렇게 해서 만든 세제가 땅의 비옥도와 기후에 따라 등급을 나눠 징세하는 ‘전분 6등, 연분 9등제’다.

세종은 ‘눈높이 소통’만 한 게 아니다. 훈민정음 창제와 4군6진 개척 때는 신하들의 반대를 단호히 물리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 대신 신하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다. ‘책임 정치’를 실천한 리더.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을 이해하는 열쇳말이다. 공론 풍요에 드리운 책임 빈곤의 그늘을 비추는 거울 같은 언어이기도 하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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