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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부즈맨 칼럼] 벌판 위의 나무 한 그루 /나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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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7-31 20:32:59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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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맞고 서 있는 벌판 위의 나무 한 그루. 네 장의 긴 편지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바람을 맞고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에 대한 묘사는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뻤던 Y에게 나 역시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닌데 그녀가 내게 먼저 대시(?)를 했다. 한동안 그녀와 나는 서로의 절친이었다. 편지는 그녀와 나의 관계가 소원해질 때쯤 받았는데 그때는 별생각 없이 넘기고 말았다. 그에 대한 답장도 어떠한 말도 건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 편지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Y의 비밀을 안 건 어느 날 그녀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당시 명문대를 다니던 친오빠에게 성폭행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Y는 남 이야기하듯 내게 들려주었다. 엄청난 비밀을 알아버린 나는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힌 채 굳어 버렸는데 그녀는 너무 의연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서는 그녀가 미워졌다. 대체 어쩌라고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한 것인지…. 그녀의 오빠는 물론이고 큰 비밀을 가진 그녀와 마주치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정말 막막했다. 그저 그녀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얼마 전 또 한 명의 Y를 만났다. 그녀는 일곱 살 때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깊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온 그녀가 세상을 향해 상처를 내보인 건 서지현 검사의 성폭행 폭로를 접하고 나서였다. 두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지켜왔던 안온한 가정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깊은 속병을 앓고 있을 또 다른 Y들을 위해 무엇보다 성폭력상담소,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되새기며 용기를 다졌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지역사회에 가해자의 파렴치함을 알려 공개적으로 사과하게 만들고 그와 동시에 아동성폭력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소멸시켜 아동성범죄에 대해서는 영구적인 징벌이 가능하다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힘없고 어린 나이에 받은 수모와 상처를 털어내기 위한 그녀의 몸부림은 상처를 숨기고 있었을 때의 지난함과 별반 다르지 않다. 웬만한 사람은 알 정도의 이름난 식당을 운영하며 부를 거머쥔 가해자는 사과를 촉구했으나 오히려 살해의 위협을 가하는 언어폭력으로 그녀를 위기감에 빠뜨리고 있다고 한다. 그의 가게 앞에서 1인 피켓 시위를 벌인 후에 가해자는 명예훼손으로 그녀를 고소하며 무자비한 협박을 가하고 있지만 아동·청소년 성폭력범죄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진행하는 등 그녀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미투(Me Too) 운동으로 한동안 우리 사회가 시끄러웠다. 그러나 그때 회자되었던 가해자나 피해자는 모두 유명인이었다. 온전한 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 깊은 바닷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일반인 가해자들에 견주면 이들 유명인은 빙산의 일각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환희의 순간은 찰나이거나 도무지 오지 않고 부조리하고 지루한 날들만이 이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내내 Y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이 그녀를 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세상이 변했다. Y들 스스로 용기를 내고 기꺼이 지난한 투쟁에 나서고 있다. 벌판 위에 홀로 선 나무 한 그루로 자신을 표현하며 손 내밀던 친구에게 따뜻한 포옹 한번 해주지 못한 지난날의 나처럼 그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 우리는 세찬 바람 앞에 선 한 그루 나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크림전쟁에서 벌어진 군부의 무능력에 대해 지휘관들을 맹비난하는 사설을 서슴없이 실었던 타임스 편집장 존 딜레인의 펜을 막기 위해 영국 정부와 군부는 반역과 속임수라는 죄목을 붙여 통제하려 했지만 딜레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부정한 영국 정부를 무너뜨린 위대한 폭로자가 되었다. 크림전쟁 중 4개월여간의 기록을 적은 ‘펜의 힘’에 실린 내용이다.

“언론이 섬기는 건 국민이다. 우리가 보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고 국민이 지는 겁니다.” 영화 ‘더 포스트’에 등장하는 ‘워싱턴 포스트’지의 발행인 캐서린은 이렇게 일갈했다. 이러한 진정한 언론인의 모습이 책이나 영화 속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힘없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국제신문이 되어주길 바란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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