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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땅의 길 /하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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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7-20 19:33:27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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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 이른다. 안의초교에 그 흔적인 사적비를 남기고 있는 연암 박지원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서다.

연암은 안의현감 시절이 일생에서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한때 권신 홍국영의 박해를 피해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김천 ‘연암협’에 은거하는 바람에 그의 ‘호’를 얻기도 하고, 삼종형인 박명원과 함께 북경을 거쳐 건륭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까지 갔다오면서 ‘열하일기’를 저술하기도 했다.

박지원이 굳이 중국을 다녀온 것은 북경을 먼저 다녀온 홍대용의 영향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동기는 조선의 협소함이 아니었겠는가 싶다.

‘연암집’의 ‘회우록서(會友錄序)’에 보이는 다음의 구절이 이를 짐작게 한다. ‘이 땅, 백 리 되는 평야가 드물고 천 호 되는 고을이 없으니, 그 지세의 되어 있는 품부터 역시 애초에 편협하다’.(이동환 역)

편협한 지세가 곧장 편협한 사람됨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고기와 물, 작물과 밭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큰 물고기는 큰물에 살고, 좁은 밭에 사는 작물은 솎아주지 않으면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잇달아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직 좋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같지 않을 뿐인데 의논 대립의 격렬함은 진·월보다 더 이질적이고, 오직 처해 있는 입장에 차이가 있을 뿐인데 명분 구별의 명확함은 화·이보다 더 엄격하다’.

그러다 보니 좁은 땅을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토지 겸병에 여념이 없고, 한정된 벼슬을 서로 자파들끼리 차지하려고 당쟁에 몰두하게 된다. 백성들의 삶이 안중에 있었겠는가.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화전민이나 유민이 되고, 여차하면 도둑이 되고 산적이 되는 삶을 산다. 그들에 대한 기대감이 ‘의적’ 개념을 만들어 냈다.

이는 일지매니 홍길동이니 장길산이니 하는 서사의 바탕이 된다. 이런 일련의 뜻이 담긴 연암집의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는 에릭 홉스봄의 ‘의적의 사회사’(황의방 역)를 선취하고 있다.

그래서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이르러 마주친 풍광에 다음과 같이 말했으리라. ‘지금 이 요동벌 여기서 산해관까지 1200리 사면에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끝을 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맞닿아 있고, 비와 구름이 예나 지금이나 오직 창창하기만 하니 한바탕 울부짖어 보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고산 역해)라고.

이는 그보다 앞서 백호 임제가 임종시에 자식들에게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에 담긴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신라의 최치원이나 고려의 이제현이 중국의 서촉과 강남 땅을 여행했으나, 자신처럼 북녘 변두리 열하까지는 오지 못했다고 하며 스스로 뿌듯해 하기도 한다.

심양과 봉천을 지나면서는 고구려 국토임을 떠올리는 등 역사적 안목을 번득이기도 하고, 월사 이정구의 호가 율곡이라고 되어 있는 것 등 중국에 잘못 전해진 조선의 사례를 지적하기도 한다.

중국에 들어가 매우 성하게 간행된 동의보감과 그 서문을 소개할 때는 민족 자존의 심정도 읽히고, 중국인을 상대로 절친 홍대용의 천문학과 지전설을 이야기해줄 때는 그들에 대한 우월감을 만끽하는 듯도 하다.
땅에는 어찌 역사나 문명 그리고 학문만 스며 있겠는가. 귀양 가는 사람이 물가에서 이별하며 배로 떠나므로(배떠나기) 구슬프고 처량한 곡조의 ‘배따라기’가 유래했음을 살피기도 하고, 중국을 여행한 이들이 궁궐과 누각, 가게와 절 등 눈에 띄는 번듯한 것에만 눈이 팔리는 것을 경계하며 기왓조각이나 조약돌이 모두 장관일 수 있음을 그 섬세한 실학적인 시선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하룻밤에 아홉 번 강 건너기’를 통해서는 물소리와 생각을 결부시켜 도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학구적인 면모를 보이는가 하면, 물이 없어 술로 먹을 갈아 장성 벽에 ‘건륭 45년 8월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라고 써놓고는 큰 웃음을 날리는 풍류가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장사치들이 좋은 물건을 택하지 않고 값이 싼 것만 찾는다는 중국인의 말을 인용할 때, 중국 어민들의 막무가내한 서해 어로와 우리 변방 수비의 곤혹스러움을 말할 때는 마치 오늘날의 현실을 마주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길을 가는 자의 시선이 얼마나 넓고 깊은가에 따라 땅은 그것에 맞는 내장한 사연을 들려줄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은폐와 개진을 이야기한 것처럼.

도보여행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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