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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칼럼] 워라밸·스라밸, 삶의 균형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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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7-05 19:36:24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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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당 ‘52시간 근무제’가 실시되었다. 사람들은 이른바 ‘워라밸’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이라는 표현은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 그리고 1980년대 미국에서 개인의 업무와 사생활 사이의 균형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의 앞글자를 음차해서 줄임말을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워라밸이라는 말은 2016년부터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 같다. 이에 더해서 올해 초부터는 ‘스라밸’이라는 말도 퍼지기 시작했다. 이것도 영어의 ‘공부와 삶의 균형(study-life balance)’이라는 표현을 음차해서 줄인 말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도 공부와 휴식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일상 현실을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닭장, 조립된 레고 인형, 수많은 시계, 에너지 드링크, 학원가 간판들의 콜라주 등을 그린다고 한다. 이와 다른 삶을 이미지화하라고 하면, 꽃밭, 태양, 파란 하늘, 푸른 초원, 느긋하게 낮잠 자고 있는 고양이, 뛰어노는 강아지 등을 그린다고 한다.

노동 과잉과 공부 과잉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워라밸과 스라밸 같은 독특한 줄임말들이 이를 개선하기 위한 모토로까지 쓰인다는 것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현상이다. 이들 ‘조어가 담고 있는 의식’이 근본적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워라밸의 의식에는 일과 삶이 분리되어 있다. 워라밸의 이미지는 일과 삶이 천칭(天秤)형 저울의 양쪽 끝에서 서로 무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과 같다. 그만큼 일과 삶은 양극단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언급했듯이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말은 서양어에서 온 것이다. 서양인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현대 서양사상은 ‘소외’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소외(alienation)를 풀어 설명하면 ‘다른 것이 되게 하다’라는 뜻이다. 소외의 서양어가 에일리언(alien), 곧 외계인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점도 서양식 소외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산업혁명 이후 현대 서양인의 의식 속에서 일과 삶은 ‘서로 다른 것으로’ 분리되어왔다. 소외된 것이다. 사람은 일로부터 소외되고, 일은 삶으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에일리언이 된 것이다. 생경하고 이상하며 때론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외계의 그 무엇이 된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공부는 삶의 대척점에 있다. 삶이 아닌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겐 생명력이 넘쳐야 한다. 생명의 본질 그 자체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생명체에게 삶이 아닌 것은 외계에서 침투한 바이러스와 같다. 삶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배우지 않고 살 수도 없다. 이는 고대로부터, 아니 원시시대부터 시작된 인류의 삶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과 배움은 삶의 일부이며 삶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삶이라는 큰 집합 안에 일도 있고 배움도 있고 여가도 있고 놀이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의식은 워라밸과 스라밸의 모토처럼 삶과 일을 또한 삶과 배움을 분리할 뿐만 아니라 전혀 상반된 것으로 취급한다. 물론 이런 의식은 삶의 현실을 반영한다. 일과 배움을 삶의 의미에서 배제했다는 것은 일과 배움이 아직 억압적이며 구속적인 조건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노동과 학습을 아직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의식은 노동 정책과 교육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양적 접근을 하기 때문이다. 노동과 학습 시간을 줄이면 삶의 시간이 늘어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일과 배움을 삶의 한 부분이자 삶의 한 형태로 인식하면 질적 접근이 본질적이며 필수적임을 깨닫게 된다.

기꺼이 일하고 기꺼이 배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나아가 일이 즐겁고 배움이 즐거울 수 있는 질적 조건, 곧 좋은 근로 환경과 수업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면 노동과 공부가 더 이상 삶으로부터 분리된 외계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귀환하게 된다. 워라밸과 스라밸은 삶을 단편적으로 보기 때문에 생기는 의식이다. 여가(leisure) 활동이 지나쳐 피로를 느끼면 ‘레라밸’을 추구하고, 아이들의 놀이(play)가 지나치면 ‘플라밸’을 찾을 텐가. 피로 사회의 위험은 항상 도사린다. 삶을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면 그 위험이 현실화된다.
일과 삶의 균형 그리고 공부와 삶의 균형은 삶에 지친 우리 의식이 왜곡되게 희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것은 ‘균형 있는 삶’ 또는 ‘삶의 균형’ 그 자체이다. 일과 배움뿐만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 사이의 균형, 그것이 삶을 생동감 있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형용모순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죽은 삶’이 된다.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 알크마이온은 인간의 몸이 단순한 물리적 개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 구성 요소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 건강한 것이고, 그 가운데 하나가 다른 요소들을 침범하여 균형이 깨지면 건강하지 못한 상태, 즉 병이 난다고 설명했다. 이와 유사한 입장은 동양의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균형이 그 자체로 인간의 존재적 조건임을 보여준다.

알크마이온은 신체의 여러 요소가 ‘동등하게 균형’을 이룬 상태를 ‘이소노미아’라고 했고, 어느 한 가지 요소가 지배적인 상태인 것을 ‘모나르키아’, 곧 ‘한쪽의 지배’라고 불렀다. 그가 인간의 건강과 병리적 상태를 설명하는 데에 정치적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도 동등권(isonomy)과 군주제(monarchy)로 사용되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삶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삶에는 아직 일과 공부가 군주처럼 군림하며 왜곡된 워라밸과 스라밸을 갈망하는 우리 의식까지 지배한다. 삶의 각 요소 사이에서 민주적 균형이 없으면,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충분히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철학자·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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