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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어제 이곳을 떠난 시인에게 부치는 편지 /정훈

바람직한 시인 모습 그려보지만 늘 허탕…불변하는 아름다움 사람들에 행복 선사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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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6-20 19:24:19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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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가 ‘신곡’에서 묘사한 천상의 여인 베아트리체와 같은 존재를 보고 싶다고 형은 자주 입에 올렸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숭고한 그 무엇이 우리 발목을 낚아채는 때가 많지요. 그러나 돌아보면 그것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이름이 자유든, 행복이든, 사랑이든 우리는 너저분하고 거추장스러운 것들로 가득 찬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고개를 꺾어버립니다. 영원한 것이 있는지 없는지 토론하며, 때로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이 보란 듯이 배반을 할 때면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리기도 했지요.

삼삼오오 무리 지어 앉아서 문학과 정치를 얘기합니다. 그 낯설지 않은 풍경이 어딘가 모르게 역겹다는 말을 형은 한 적이 있습니다. 형은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행복과 평화를 저당 잡혀서 맑은 한 줄의 시를 쓸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저는 침묵했지요. 시는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어쩌지 못할 정도로 온몸을 채워서 그 감흥이 절로 흘러넘치기를 기다려 쓰게 되는 육필의 문장이라고도 했습니다. 정치와 사회와 공동체의 이념이 시인을 포획해서 만들어내는 시가 아니라, 시인 하나하나 자신만의 이념과 사상을 뿌리는 시가 좋다고도 했지요.

그렇기에 모든 좋은 시는 하나로 수렴되는 모양입니다. 그것은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함축한 시입니다. 현실을 모반하고 배척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한낱 사람에 관한 시도 아닙니다. 영원한 것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시인은 영원히 지속될 세계의 모든 긍정적인 요소를 빨아들여 미리 보여주는 사람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시인은 공동체에 속하되 결코 이들과 함께할 수 없는 이방인이자 나그네입니다. 그러면서 시민의 일원이기도 하지요. 시민과 지식인으로서 시인이 있는 반면에 그 어떤 수식도 필요하지 않은 시인이 있습니다. ‘시인’은 말 그대로 시인일 뿐입니다. 형은 단지 시인으로서만 살다 가고 싶어 했습니다. 군더더기 같은 다양한 생활인의 업(業)은 시 앞에 서면 무력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은 시를 쓰기만을, 시인으로서만 살다가 가고 싶어 했습니다.

여러 시인을 만나고 집으로 오는 날엔 생각이 많아집니다. 시란 무엇인가, 그리고 시인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제 머릿속을 휘젓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시인의 모습을 그려보지만 늘 허탕이지요. 현실과 생활에 토대를 두지 않고 관념의 세계를 직조하는 시들을 봅니다. 그만의 베아트리체를 꿈꾸는 모양입니다. 저는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것을 보고 싶어 하고 꿈꿉니다. 이것들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요. 색계(色界)에 파묻혀 사는 이들에게는 영원하거나 불변하는 것이 없다고 믿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도 어느 순간 불변하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오전에 집을 나서니 사방이 희뿌연 연기 속에 갇혀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어두웠는데 자고 일어나서 보니 또 다른 어둠이 나를 에워쌉니다. 낡은 운동화를 신고 걸으니 한여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거리는 나 같은 나그네의 형체를 본 체 만 체 묵묵부답이요, 심심한 물상(物象)처럼 그대로지요. 저는 온데간데없는 생의 구경꾼입니다.구름이 먹을 칠한 채로 나를 향해 달려옵니다. 그러나 ‘오늘 날씨는 아주 맑았다’고 일기장에 써야겠어요.

요 며칠간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제가 불러일으킨 화두의 결과입니다. 시는 괴상한 얼굴을 한 채 제게 웃습니다. 그 웃는 낯에 색칠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아직 붓을 들지 않았습니다. 미친 척 형형색색 난도질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렇기에 제 마음 깊은 속에 자리한 쥐털 붓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참 미련한 차림새지요. 시 쓰는 사람들의 생각 속엔 온갖 말의 치장만 쏟아 부을 태세인 것 같더군요. 걸어 다니지 않고 안락한 걸상에 앉아서 사색만을 하지요. 그러다 차 한 잔을 마시면 좋은 말들이 더욱 예쁜 낯으로 시인을 꼬드길까요. 시가 단순하게 말의 조합이나 배열만으로 색다른 시적 형식을 갖출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림도 없지요. 시인이 시를 낳지만, 실은 시가 시인 됨됨이를 재형성하는 질료가 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바위 벼랑 끝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갯바람 뭉치들이 쑥쑥 몸을 휘저을 때 떠나온 고향도 뒤로 물러섭니다. 그러다가 울컥 말을 내뱉고 싶으면 두꺼운 목청을 가까스로 비집고 나온 말이 저 세찬 파도 위를 올라타 시원하게 내달릴까요. 저 수평선과 하늘까지 가 닿을 수 있는 말이라면 오래지 않은 삶 비로소 깨끗이 가라앉을까요.

폭풍우처럼 말들이 휩쓰는 시대입니다. 이렇게나마 안부 전합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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