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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갈맷길과 행복지수 /이흥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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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6-20 19:32:21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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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걷기 예찬론자다. 평소 자전거로 출퇴근하기는 하지만 이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보석 같은 푹신푹신한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뙤약볕을 가려주는 숲속의 둘레길이면 금상첨화다. 현호색이나 초롱꽃 같은 이쁜 야생화라도 조우하면 한참 동안 눈을 맞춘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데 없이 냉가슴을 앓을 때나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는 신기하게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걷는 게 휴식이자 위안이고 길이 마법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서울 도봉산에 오른 적이 있다. 그가 어릴 때 뛰놀던 코스로, 요즘으로 치자면 둘레길 걷기였다. 취재 목적이라 묻고 답하던 중 갑자기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고 쏜살같이 내달리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 온 동행인을 배려하지 않아 약간은 섭섭했지만 그 이유를 1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1980년대 국내 산악계를 호령했던 여성산악인 남난희는 하동 불일폭포로 가는 도중 이를 두고 이렇게 설명했다. “엄 대장과 같이 산과 오랫동안 함께한 이는 산과 합일되는 시점이 일순간 찾아와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의식하지 않게 되는 시점이지요.” 우리 같은 장삼이사야 엄 대장과 같은 경지는 꿈도 못 꾸지만 적어도 걷는 동안 사바세계의 헛된 꿈을 잊고 그 순간만이라도 몰입할 수 있는 작은 힘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집 근처에 해발 199m짜리,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다. 화지산이다. 조선 영조 때 여암 신경준이 쓴 ‘산경표’에도 등장하는 족보 있는 산이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즉 산은 스스로 물과 고개를 가른다는 지침을 충족시키며 한반도의 산줄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산경표는 이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화지산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낙동강 물줄기의 동쪽을 따라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한 작은 봉우리다. 화지산에선 꼬불꼬불한 소로를 천천히 걷기도 하고 격하게 땀을 쏟고 싶을 땐 된비알을 오른다. 아내와 함께라면 편평한 둘레길을 걷다 수년 전 조성된 보행교를 건너 시민공원까지 이동한다. 나 홀로 코스를 연장할 땐 산을 넘고 길을 건너 금정~백양 능선을 걷는다. 남으로는 초읍 어린이공원에서 선암사나 백양산으로, 북으론 남문과 동문까지 내달려 금정산 고당봉이나 범어사까지 갈 수 있다. 초읍으로 이어지는 길이 갈맷길 6코스, 금정산으로 가는 길이 7코스의 일부이다.

이처럼 갈맷길은 작심하고 찾아야 하는 제주 올레와 달리 배낭에 물 한 통만 챙기고 문만 나서면 언제나 곁에 있는 일상 속의 길이다. 사실 제주 올레는 천연 숲인 곶자왈과 기생화산인 오름길 이외에는 명성과 달리 뙤약볕을 걷는 포장로가 생각보다 많아 과대 평가됐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9개 코스, 20개 구간, 총연장 278.8㎞의 암팡진 갈맷길은 2009년 부산의 걷기 시민모임과 함께 국제신문 그린위킹팀의 노력 끝에 완성됐다. 갈맷길이란 이름도 시민공모를 거쳐 탄생했다는 사실 또한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갈맷길을 계기로 사단법인 ‘걷고싶은 부산’이 출범했고, 이 과정에서 ‘걷기축제’라는 콘텐츠도 탄생했다.

갈맷길을 품은 부산이 내년 10월 개최 예정인 걷기의 ‘아시안게임’으로 불리는 아시아 걷기총회(ATC)를 최근 유치했다. 하지만 2020년 7월부터 일몰제로 인해 9개 갈맷길 코스 중 5개가 일부 끊길 위기에 처했다. 문제는 사유지라 시가 매입해야 온전히 유지된다. 올해 추경에 384억 원을 편성했다지만 이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오거돈 부산시장 당선인께 부탁드린다. 강·바다·산·온천을 품어 사포지향이라 불리는 부산에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갈맷길은 그 어떤 관광상품보다 우선시돼야 한다고. 평소 부부동반으로 금정산 둘레길을 즐겨 찾는 그이기에 갈맷길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확신한다.
다음 달부터 주당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줄어 뚜벅이들이 늘 것으로 예상된다. 끊어진 채 방치된 해안길과 금정산성 둘레길 정비도 시급하다. 두 길은 갈맷길에서 간판으로 내세울 만한 핵심이 아닌가. 청년 일자리도, 주거 대책도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갈맷길도 빠질 수 없다. 갈맷길은 서민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고갱이니까.

사회2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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