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은 ‘그림자놀이’를 꽤 고상하게 즐겼나 보다. 정민 교수의 책 ‘미쳐야 미친다’에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한낮 방에서 그림자놀이를 즐겼다. 어느 가을 한낮 창이 환해지며 국화 그림자가 문종이에 비친다. 그는 급히 붓을 잡고 그림자를 따라 칠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 내려앉은 한 쌍의 나비와 참새까지 함께 그렸다. 꽃과 나비는 사라졌지만 문종이의 국화 그림자는 두고두고 남았다. 그림자는 비록 허상이지만, 실상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이덕무의 손을 거치니 ‘허상’인 그림자가 ‘실상’인 예술품으로 살아났다. 정약용은 친구들과 국화 화분을 벽에 비춰 보며 그림자놀이를 하던 광경을 ‘국영시서(菊影詩序)’에 남겼다. 술이 오르자 다산과 벗들은 감상을 시로 지어 나누었다. 그림자가 문학이 됐다.

그림자놀이는 서양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한 지인에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고대 조각상의 모조품에 불빛을 비춰 보여줬다. 이 지인은 비록 모조품이지만 불빛에 반사돼 일렁이는 대리석 조각상의 빼어난 굴곡과 그림자를 보며 황홀경에 빠진다. 로댕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 않소? 이건 정말 육체요!”라고 소리쳤다. 이 모조품의 원본은 비너스상 가운데 아름답기로는 ‘밀로 비너스’와 쌍벽을 이룬다는 ‘메디치 비너스’였다. 모조품이지만 로댕의 솜씨가 더해졌으니 ‘메디치 비너스의 그림자’로 부를 만했다. 그런데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원본 또한 원작이라고 보기엔 애매한 점이 있다. 원래는 기원전 2세기 헬레니즘시대의 원작이 있었는데 로마시대 조각가가 모각(模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로댕의 모조품은 ‘그림자의 그림자’ 격이다.

최근 부산에 모조 조각상 논란이 일고 있다.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에서 열리는 ‘미켈란젤로 메디치 마돈나 특별전-오리지널 석고상’을 둘러싼 검증 논쟁이다.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에 있는 조각상 진품이 아니라 그 석고 복제품의 ‘오리지널’ 여부를 딱 부러지게 확인할 방법이 마땅찮다는 것이다. 공식 문서는 없고 18세기 제작설과 20세기 제작설 등 가설만 있다. 알기 힘든 진실 여부와 별도로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원본 조각상의 모양을 본뜬 틀에 석고를 부어 만든 것이 석고상인데, 과연 ‘오리지널’이라는 수식어가 타당한가라는 점이다. 아, 그래도 이 석고상으로 그림자놀이 정도는 할 수도 있겠다.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