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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어머니는 뭐라고 말씀하실까 /임형석

믿었던 국가의 배신으로 전쟁고아 된 모친 세대에 북진 망령과 섣부른 희망…평화 앞두고 가소로울 뿐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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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5-16 19:29:13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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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태어났다. 아직 기어 다녔을 그해 여름 해방을 맞았지만 이내 ‘그놈의’ 삼팔선이 갈렸다. ‘쓰딸린 원수의 노래’를 배웠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불렀지만 평생을 따라다닌 어머니의 기억에는 당시가 가장 기분이 좋던 시절이었다. 이야기 듣기 좋아하는 아들이 운만 떼어줄라치면 기다렸다는 듯 눈빛은 아련해지게 마련이었고 입가의 빙긋한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나중에 ‘수복지구’라고 명명된 삼팔선 이북의 한 계집아이는 부모님, 남동생 둘과 그렇듯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가난을 못 견뎌 소년의 나이에 상인의 길로 나선 외조부는 사회주의로 변하는 ‘공화국’에서도 사업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상 세계를 뒤엎을 때까지는. 전쟁 시기라지만 본디 이북이던 탓에 피란이며 뭐도 없이 아직 안온했다. 하지만 1951년 1월, 이북 사람에게도 혹독한 피란의 계절이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집을 지키기 위해 남은 외조부 대신 외조모는 어머니와 남동생 둘을 거느리고 동향 사람들과 함께 피란길로 나섰다. 어린 자식들을 재촉하며 걷고 또 걷다가 강원도 홍천 지나 원주로 가는 국도, 미치도록 슬픈 길에서 미공군기 폭격으로 생때같은 아들 둘을 허망하게 잃었다.

슬픔도 전쟁 앞에는 사치였으리라. 피란의 물결에 휩쓸린 모녀만 이리저리 떠돌다 충청도 증평 땅으로 흘러들었다. 소강 상태에 접어든 전쟁, 외조모는 고향에 남은 외조부 소식을 탐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외조부는 반공자경단 같은 것을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많은 이와 함께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한 모양이다. 저희만 살자고 먼저 강 건너로 퇴각한 국군 탓이다. 외조모는 외조부의 비극도 알지 못한 채 증평 땅에서 돌아가고 말았다. 아홉 살 어머니는 그렇게 전쟁고아가 되었다.

나는 혈육의 무덤 하나도 갖지 못한 전쟁고아의 자식이다. 더도 덜도 아닌 내 실존의 첫째가는 규정은 바로 이것이다. 아직 철이 나기 전부터, 어쩌면 철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모든 불행의 근원이나 이유를 거푸 묻곤 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질문에 으레 긴 침묵으로 응대하기 마련이었다. 애초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당사자라서 입 밖으로 내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다시 떠올리기조차 힘든 기억인 탓이라고 어린 소견은 짐작했다. 이런 짐작도 아마 틀리지 않겠지만 긴 침묵의 또 다른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입 밖에 감히 내지 못한 소리를 속에 품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포함한 이 땅의 모든 불행한 이가 원치 않게 희생하도록 만든 책임 말이다. 성인 남자이고 비정규군이지만 참전했다고 할 만한 외조부의 희생은 전쟁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외조모의 경우처럼 전쟁 때문에 빚어진 민간인 희생에 대한 사과는커녕, 외삼촌 둘처럼 무차별 폭격으로 희생당한 민간인에 대한 전쟁 범죄는 단죄도 시작하지 않았다.

반공이 지배하던 시대 어머니의 불행은 전쟁과 그것을 일으킨 자들에게서 온 것이라고 믿었다. 나중 브루스 커밍스를 읽었을 때 어린 나이에 죽은 외삼촌의 불행을 떠올렸다. 동시에 결백하다고 믿은 이 나라도 결국 외조부를 배신하고 죽음으로 내몬 당사자였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더는 마음 붙일 곳은 남지 않았고 소위 ‘의식화’에도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일방만 편들고 반대 쪽을 향한 증오와 분노를 증폭시키려 드는 꼴은 가소로웠다. 그나저나 모두 극악한 죄를 짓지 않았던가.

당장은 비핵화가 의제이지만 종전선언이며 평화협정을 기대하는 최근 정세는 눈을 떼고 싶어야 뗄 수 없는 일, 결코 남의 일이 될 수 없는 내 일이다. 한편으론 마음이 몹시 복잡하고 불편하다. 북진통일의 망령에 사로잡혀 성조기 아래 옹기종기 모였다가 망연자실 찍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는 부류나 자신을 비둘기라고 믿는 성급한 통일론자들의 망상과 종류가 다른 복잡함과 불편함이다. 나란한 태극기도 성조기도 인공기도 오성홍기도 옳게 보이지 않을 뿐더러, 과거의 악당들이 술집에 다시 모여 이러쿵저러쿵, 수틀리면 엎어버리겠다고 으름장 놓는 옛적 서부영화의 포커 게임 장면이 덧씌워져 보일 뿐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직 살아서 지금 꼴을 봤다면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나는 미처 어머니만큼 어진 사람을 알지 못한다. 숨 붙이고 살아 있는 것이라면 뭐든 애틋하게 생각한 분이셨고 그만큼 사리에 밝았던 분이셨다. 못난 아들이 짐작건대, 이 땅의 모든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바라는 그것, 평화가 어머니 마음이지 싶다. 동시에 언제일지 모르지만 인류의 정의가 기필코 이겨서 조금이나마 한을 푸는 것도 또 한 마음일 것이다.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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