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 우리는 북한 핵문제로 야기된 일촉즉발의 위기를 겪으면서 암울한 한국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 속에 열린 남북 정상회담은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 내린 한여름 한줄기 비처럼 다가왔다. 우리에게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릴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그랬다. 올해 맞이한 고려 건국 1100주년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기억해야 할 그리고 기념해야 할 많은 역사적 사실과 사건이 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올해가 고려 건국 1100주년이라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건국 1100주년이라서 중요하다거나 기념해야 한다는 당연 논리가 아니라, 시대적 전환기를 맞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내어야 할 역사적 경험의 중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내적·외적으로 여러 시련 앞에서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외적으로 남북 관계에 기인한 미·일·중·러 4대 강국과의 외교적·경제적 해결 과제가 있다. 내적으로는 남북 관계에서 비롯된 이념적 갈등이 우리 사회를 극단적 대립으로 몰고 가고 있다. 어떻든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들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지나간 우리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겪은 역사적 시련은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으나,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여기서 고려의 건국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신라 말의 혼란상을 극복하고 후삼국의 쟁패기를 거쳐 등장한 고려는 국가적 안정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지방세력에게 포용정책을 취했다. 지방세력을 국가체제 속으로 포용하기 위해서 태조 왕건은 ‘중폐비사(重幣卑辭)’, 즉 지방세력에 대해 좋은 선물과 자신을 낮추는 자세로 그들을 포용했다. 이에 신라는 고려에 항복했고 후백제의 견훤조차도 태조에 귀부했다. 

한편 삼국의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고 각 지역의 문화적 특질을 인정하면서 태조는 ‘훈요십조’를 통해 불교, 유교, 도교, 풍수지리 등의 사상이 폭넓게 공존할 바탕을 마련했다. 고려에서 불교가 중시되었지만, 사실상 다양한 사상이 공존하면서 다원적 질서를 구축하고 있었다. 

고려는 벽란도를 중심으로 활발한 대외교역이 이루어졌고 불교행사 가운데 하나인 팔관회를 통하여 제천의례를 행하였다. 이 행사에서 여러 산천의 신과 하늘과 바다의 신에 대한 제의를 행하였고 탐라, 여진, 거란, 송, 일본에서 상인이 참석해 국왕에게 특산물을 바치는 공식적인 의례가 이루어졌다. 고려는 팔관회적 질서를 통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에 서서 개방적 자세로 높은 문화 역량을 발휘했다.

고려 전기 국제질서는 북방에 송과 거란이 버티고 있고 바다 건너 일본이 있었다. 특히 송과 거란은 고려가 자신들 편에 서기를 강요했고 호전적인 거란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하여 고려와 송의 외교관계를 차단하려 했다. 이때 고려는 양 국가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실리 위주의 등거리 외교 전략을 시도했고 외교 전략가 서희는 거란과 담판해 강동 6주를 얻고 북방 지역을 안정시켰다.

그 이후 북방 지역에 여진이 금을 건국하고 이어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어 또다시 고려와 긴장관계가 형성됐다. 그러나 고려는 어느 한편에 기울지 않는 균형외교로 위기를 극복했다. 이처럼 고려의 외교 전략은 철저하게 국가 안위를 중심에 둔 등거리 균형 외교였다. 고려가 비록 몽고의 침략 앞에 어려운 국가적 위기를 맞았지만, 국가를 구하고자 한 처절한 민중의 대몽항쟁은 역사의 의미 있는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한국중세사학회는 사상과 문화의 다원성과 개방성, 정치와 사회의 포용성과 통합성을 가진 고려 건국의 의미를 짚어보고, 고려 건국 1100주년의 미래지향적 의미를 담아내는 다양한 학술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새로운 동북아 평화시대가 열리는 출발점으로 새로운 한국의 도약이 기대되는 해이다. 개경(오늘의 개성)을 수도로 한 고려의 역사를 미래지향적으로 재구성할 남북 간 문화 교류가 보다 필요하며 다양한 교류의 한 축으로 고려의 역사가 재조명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