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요동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다롄(大連)은 우리 민족과 인연이 깊다. 고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고구려의 다롄 통치 중심지는 해발 663ｍ의 대흑산 능선에 돌로 쌓은 길이 5㎞가량의 비사성(卑沙城)이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 비사성을 ‘사면이 절벽이고, 오직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라고 기록했다. 비사성은 황해와 발해를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비사성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때 난공불락의 위력을 과시했다. ‘수서’에는 고구려 영양왕 25년(614년) 수양제 휘하의 장수 내호아가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이곳을 공격했다가 패배해 군사를 돌렸다고 나와 있다. 그랬던 비사성도 고구려의 쇠퇴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 즉위 4년(645년)을 맞았을 때 당나라 대군과 격전이 벌어진 끝에 함락된 것이다. 현재 비사성은 대부분 중국식 축성법으로 복원돼 있지만, 대흑산 동쪽 능선에 고구려 석성의 잔해가 남아 있다고 한다.

다롄이란 지명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조차권을 넘겨받으면서 붙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다롄은 우리 민족 고난의 상징이었다. 안중근 신채호 등 수많은 항일투사가 이곳 여순형무소에 갇혀 고초를 겪다 처형되거나 옥사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롄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지난 7, 8일 회동으로 또 한번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이 핵무기뿐 아니라 생화학무기까지 포함한 대량파괴무기의 폐기를 주장하는 등 대북 요구 수준을 높이자, 북한이 중국의 힘을 빌려 협상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마련한 자리였다. 북중 정상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단계적, 동시적으로 진행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며 미국의 선 비핵화, 후 평화협정 방침에 대립각을 세웠다. 다롄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83년과 2010년 각각 중국 지도자와 회담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비록 북한에 한정됐지만, 우리 민족과 중국의 고대 격전지가 현대 들어 연대의 장소로 탈바꿈한 셈이다.

북중 정상회담이 끝난 다음 날 미국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다시 북한으로 보냈다. 북미 정상회담 의제를 둘러싼 치열한 신경전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북중 정상의 ‘다롄 정치’가 북미의 힘겨루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