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이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남북의 거리는 짧았고, 두 정상의 악수는 길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만남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12시간여 만남은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어젖혔다. 남북 관계는 물론 북미 관계, 북중 관계 등 동북아 전반에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키워드는 ‘평화’이다. 격변의 시작이다. 향후 정세가 어떻게 펼쳐질지 점치기 어려울 만큼 큰 폭의 변화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된다.
4·27정상회담은 역사에 아로새겨졌던 판문점의 화면을 일거에 바꿨다. 바로 휴전협정 조인식이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11분간 진행됐다. 그때도 기자들이 몰렸다. 이번에는 3000명의 기자가 경기도 고양시에 마련된 메인 프레스센터에 모여들었다. 1953년에는 100여 명이었다. 지금의 3000명에 버금가는 숫자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한국 기자가 2000명 정도였는데 당시에는 두 명에 불과했다.
조인식 현장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흔한 악수도, 인사도 없이, 판문점 동쪽 입구에서 들어온 해리슨 장군 등 유엔 측 대표 네 명과 서쪽에서 들어온 남일 등 북한 측 대표 네 명은 조인식장에 앉았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등 3개 국어로 된 협정문에 쉴 새 없이 사인한 뒤 퇴장했다. 물론 기념촬영도 없었다. 걸린 시간은 11분이었다.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11분 만에 결정된 또 한 번의 현장이었다. 반면 이번에는 남북이 우리 운명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65년 만에 역사의 장면을 180도 돌려놓았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를 돌아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다”라고 말한 것이 주목된다. 임종석 비서실장 또한 “살얼음판에서는 속도를 늦추면 안 된다”고 말했다. 상징적이다. 지난 김대중 대통령 시절 6·15 정상회담이나 노무현 대통령 시절 10·4정상회담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상황이 바뀌면서 합의 내용이 무산된 경험이 있는 만큼 빠르게 상황을 변화시켜 기정사실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과거 두 차례 정상회담과 다른 점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시기적으로 집권 1년 차에 정상회담을 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에는 집권 3년 차, 집권 5년 차에 정상회담을 했다. 이번에는 정권의 힘이 강력할 때 회담이 이루어져 힘 있게 사안들을 주도해 갈 수 있다. 또 남은 임기 4년 동안 합의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시간적 여력이 있다.
물론 바탕에는 미국과 중국, 특히 미국의 지지와 협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그래서 이르면 5월에 열릴 북미 정상회담이 더더욱 중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두 정상이 ‘도보다리’에서 44분간 나눈 밀담은 마중물과 같다. 이런 형식 자체가 파격이다. 수행원도 없고 기록자도 없는 가운데 진행된 두 정상의 대화는 훗날 정세 변화를 좌우한 하이라이트로 평가될 것이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한 대화를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생각을 듣고 조언을 해주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 문 대통령이 마중물이자 노둣돌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분명 한반도의 봄은 오고 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김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 여기까지 오고 나서 돌아선다면 국제사회에서 그가 설 곳은 없다. 김 위원장도 이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최근 행보는 북한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전략적인 선택이다. 그러하기에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과감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아니면 국제사회에 성공적으로 데뷔할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라는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처럼 흥분할 필요는 없다. 성급한 기대를 표출하는 것도 이르다. 역사를 보면 우연히 일어난 작은 사건이 큰 물줄기를 바꾼 경우가 드물지 않다. 북한은 물론이고 주변국들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치밀하게 상황을 관리해가야 한다. 전달자가 아니라 조정자로서 국면을 이끌어가는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또한 내부 소통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국회에 관련 내용을 자세히 보고하고 여야 지도자들과도 수시로 상황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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