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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감성터치] 유일한 여행자 /허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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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4-29 19: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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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서울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4월의 궁궐은 어떤 빛들을 뽐내고 있는지 양껏 보고 싶었다. 일주일 전부터 창덕궁 홈페이지에 접속해 후원 관람을 예약하고, 서울행을 준비했다. 후원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1시간마다 입장객을 100명으로 정해두고 있어, 나처럼 어리바리하거나 PC에 서툰 사람들은 입장권을 얻기가 영 쉽지 않다. 이미 두 번이나 예약에 실패했던 터라, 연습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다행히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오후 4시, 예약한 시간에 맞춰 당당한 걸음으로 후원에 들어갔다. 전체 입장객의 절반에 달하는 표를 매일 아침부터 현장에서 판매하고 있지만, 이것도 선착순인 터라 대부분의 관람객은 PC 사용에 능숙하고 체력 좋은 젊은이들이다. 하지만 예약 삼수생인 나보다 씩씩하게 들어서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백발의 할머니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길을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 싶었는데, 그건 단순히 백발의 그녀가 관광지에 홀로 입장한 것 때문은 아니었다. 할머니 옆에는 바퀴 달린 장바구니인 ‘구루마’가 당당히 서 있었다. 한복으로 멋을 내거나, 등산복으로 무장한 관광객들 사이에서 할머니의 구루마는 몹시 눈에 띄었다.

‘혹시 여기가 남대문 시장으로 알고 오신 건 아닐까?’. 많은 사람이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할머니는 100명의 관람객 중 또렷한 물음표와 같은 존재였다. 도무지 의문이 풀리지 않을 때쯤 할머니의 목에 걸린 디지털카메라를 발견했다. 그제야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살짝 들뜬 그의 표정을 알아챌 수 있었다.

후원 관람은 문화재 해설사와 함께 1시간 30분 동안 움직이는 일정이었다. 할머니는 출발과 동시에 앞장섰다. 구루마는 덜컹덜컹 흙길에서 잘도 굴렀다. 그것도 잠시, 이내 체력이 떨어져 가장 뒷줄로 밀려나기 일쑤였지만, 어느 목적지든 할머니는 환한 얼굴로 도착했다. 그리고는 먼저 온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인사를 일일이 건넸다. 해설사의 설명을 꼼꼼히 듣고 누각의 지붕부터 주춧돌까지 사진으로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정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광경이라도 한 번에 많은 곳을 보는 건 쉽지 않았다. 의욕 넘치던 할머니도 맨 뒷줄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도 할머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운찼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 구루마만 있으면 내가 지한테 기댈 수도 있고, 이래이래 의지가 된다”면서 말이다. 그러고선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두 번째로 보러 왔어. 이 늙은이가 또 왔다고 임금님이 놀라겠네”라며 꺼이꺼이 웃어 보이는 것으로 모두를 안심시켰다.

할머니는 꼴찌로 걸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99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이다. 쉬 좁혀지지 않는 간격에 조바심이 나고, 두 발이 더욱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그 길에 기꺼이 나섰다니, 모두의 뒷모습을 보며 걷는 건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니, 되려 할머니는 도리질을 치며 이렇게 물을 것이다. 노인의 느린 발걸음이 조바심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 노인의 호기심에 무슨 용기가 필요하냐고. 그제야 나에게는 없고 그에게 있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그날 여행자는 할머니가 유일했다.

스스로 길을 택하고 지쳐도 끝까지 걸었으며, 곁에 있는 사람들과 마음껏 웃음을 나누었다. 자신을 지탱하는 두 바퀴의 구루마와 함께 봄비처럼 통통한 호기심을 따라가는 여행자라니. 할머니는 100명의 사람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난 두 번이나 틀렸다. 할머니의 느린 속도에 장바구니를 뺏으며 채근하려 했고, 용기라는 이름을 제멋대로 붙여 그의 반짝이는 호기심을 가려버렸다. 언젠가 양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채현국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노인은 늙은 결과가 아니라, 젊게 산 것의 결과”라고.

마음의 근육만 있다면 세월의 공격이 대수랴? 그들은 이미 힘찬 두 바퀴를 타고 삶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데 말이다. 할머니의 분홍색 장바구니를 들추면 지난날의 모험이 생기 넘치는 흔적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따뜻한 계절을 따라 할머니의 구루마 여행이 계속되길 바란다.

미디토리 협동조합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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