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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육백 살 푸른 청년 /손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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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4-27 20: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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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과정을 맞고 있습니다. 2000년 고령화사회(7%)를 지나, 2014년 고령사회(14%), 2026년 초고령사회(20%)가 될 전망이고, 2050년이면 65세 이상 노년층의 비율이 37%로 세계 최고의 노인나라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장수(長壽)가 오복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던 우리가 바야흐로 백세시대를 맞았으니 오랜 꿈 하나가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겠지요. 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신체가 쇠약해지고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과 맞닿아 있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면 장수한 기쁨도 보람도 맛볼 수 없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장수가 복이 아니라, 사회문제가 되고 가정의 짐이 되는 안타까운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여행할 때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백세시대도 백세시대에 적합한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온전한 백세시대를 누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속도에 쫓겨 살다보니 백세시대를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만족감 속에서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면 백세시대를 성공적으로 산 것이 아닐까요.

경북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에는 수령이 600년 정도로 추산되는 석송령(천연기념물 제294호)이란 소나무가 있습니다. 이 소나무는 인격이 부여된 특이한 존재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소나무는 약 600년 전 풍기지방에서 시작된 홍수에 떠내려 오는 것을 지나가던 사람이 건져내어 심은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마을의 주민이었던 이수목이라는 분이 이 나무에 영감(靈感)을 느껴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자신이 소유한 6600㎡의 토지를 상속시켜 문서 등기를 했다고 하는군요.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새벽에 동제(洞祭)를 지내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수호해 주고 있다고 굳게 믿고 절대적 믿음의 대상으로 숭앙하고 있습니다.

연세 든 어르신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제대로 대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건은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들면 하나는 간섭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될 수 있으면 입을 다물고 참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머니를 아낌없이 풀어놓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물 때 다물고, 열 때 여는 것인데 석송령은 바로 이 두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석송령이 누구에게 잔소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면적이 자그마치 340평이나 되는 그늘을 펼쳐 소백산 자락의 55가구 동네사람 모두가 한꺼번에 다 들어앉아 쉴 수 있도록 넉넉히 품어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가는 나그네와 온갖 미물까지 푸근하게 맞아줍니다. 또 맑은 솔향으로 주변을 향기롭게 하고, 새들의 노랫소리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아름답게 늙는 것은 아무나 못 할 일인데 석송령은 잘 생긴 동신목(洞神木)으로서 마을 풍광에 운치를 더해 마을을 더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또 소유 농지를 경작하는 사람들로부터 토지세를 받아 수익에 따른 제반 세금을 정확하게 납부하고 남은 돈은 은행에 저축하고 있으며, 저축한 돈주머니를 화끈하게 풀어 마을에 거주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큰 어른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하는 듯 어쭙잖은 군식구도 살갑게 보듬고 태없이 품속을 들쳐 속내까지 나누며 베풀고 또 베풀 뿐입니다. 정현종 시인은 ‘나무들은/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라고 노래했고, 박시교 시인은 ‘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고고한 사람이다’라고 노래했는데, 석송령이 바로 그런 존재인 것 같습니다.

존경받는 어른이 많은 사회일수록 문화적으로 성숙한 사회입니다. 뿌리가 깊어 청청한 육백 살 푸른 청년, 석송령을 보면 우리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당당하고 너그러운 어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존재, 그런 멋진 어른이야말로 바로 백세시대의 사표가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석송령과 같이 숭앙하고 우러러볼 어른이 몇 분이나 계실까요.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라고 여겼던 원로의 숨겨졌던 추한 모습 때문에 그런 분들조차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나이 들어도 정말 멋지고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면,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을 맞아 석송령의 신령스러운 기품에 흠뻑 젖어 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해동중 교사·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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