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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칼럼] 누구를 왜 존경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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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4-26 19:26:52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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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있는 자’들이 벌이는 일이 연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정계, 법조계, 문화계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폭로되는 성폭력 사건들에서 이제는 국제적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각종 ‘갑질(Gabjil)’ 사태에 이르기까지 뉴스에서 빠지는 날이 없을 정도다. 해외 언론에서는 한국의 갑질을 유형별로 분류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성폭력도 갑질의 한 부류일 수 있다. 갑질은 이제 재벌(Chaebol) 못지않게 해외의 중요 사전에 공식 등재될 판이다.
   
그런데 이런 사건의 주인공인 ‘힘깨나 쓰시는 분’들은 또한 ‘사회 지도층 인사’라고 불린다. 정계와 법조계의 고위 공직자, 문화예술계의 거장, 국가경제에 영향을 주는 대기업의 경영자, 그들은 추행과 비리가 폭로되기 전까지는 사회 지도층으로서 당연히 존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존경의 당위성’이 오랫동안 그들의 어두운 이면을 위장해주는 사회적 통념이 되어온 것이다.

최근의 사태들은, 그것이 갑질이든 성폭력이든 권력 비리든, 모두 이 ‘사회적 통념의 혼란’이라는 지점에 수렴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기초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이는 특히 ‘왜 누구를 존경해야’ 하는지 항상 의구심을 갖게 마련인 성장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 교육적 차원에서 중요하다. 존경의 당위성이 악용된 사회만큼이나 존경심이 실종된 사회는 인간관계에 적신호이기 때문이다.

존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회에 존경받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존경심이 생기고 어떤 경우에 존경심은 사라지는가. 존경은 즉각적 느낌이거나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당연히 존경받아야 하는 사람은없다. 아이는 어른을 공경하고, 학생은 선생을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물론 존경하고 존경받는 관계는 사회생활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의 자연적 당위성은 없다. 존경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존경의 대상은 부모, 어른, 선생,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에 폭넓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부모는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 자식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크고, 어른 역시 아이에 비해 그러하며, 사회 지도층 인사 역시 사회 전체를 생각하고 폭넓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학자나 예술인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은 공동체 의식이 투철하고 항상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일을 위해 노력하며 실제로 공동체에 이득이 되는 성과를 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존경심은 이런 기대가 반영된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공공선(公共善)을 성취할 잠재력을 지닌 사람에게 ‘존경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이해타산적이라고 비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이로움과 해로움을 구분하여 판단하고 그런 판단 아래 사회를 합리적으로 구성해가는 방식이라면 긍정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경심은 공공선을 위한 기대치를 저울질하여 내보이는 인간관계의 표상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에 폭넓게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당연하게 존경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사실 공공선의 창출자일 것이라는 기대치 때문에 존경받는다.

그들을 향한 존경의 표시에는 “사익에 집착하지 말고 공동체를 의식하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 달라”고 하는 기대가 전제되어 있다. 선생 의사 판검사 의원 장관 회장이라는 명칭 때문에 존경하는 게 아니라, 그 명칭이 지금까지 지녀왔던 공공 이익 실현의 기대치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다. 일정 사람들에 대한 그런 기대치는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자리잡아 왔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 이름만 들어도 당연히 존경심을 보여야 하는 것처럼 고정관념이 된 것이다. 존경받는 사람들이 그 기대치를 현실에서 항상 충족시킨다면 그런 관념은 나쁘지 않다. 좋은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서 자리 잡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일은 항상 좋은 쪽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그들이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럴 생각조차 없는데도 존경한다면, 그것은 단지 이름에 속는 것이고 허상에 대한 숭배와 다름없다. 바로 이 점에서 젊은이들은 혼돈을 겪기도 한다. 사회 지도층 인사를 존경해야 한다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당위’와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저울질해서 존경의 여부를 가리는 ‘판단’ 사이에서 혼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통념의 혼란에 빠지지 않고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존경받을 사람이 존경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공인들이 그 이름에 걸맞게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도덕적 원칙을 따르고 공동체 의식에 투철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기를 바란다. 존경이란 바로 이러한 노력의 대가이다. 곧 사회적 포상(褒賞)인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곧 존경심이라면 그것은 합리적 판단이 감성적 울림을 가져오는 건강한 사회적 이해관계의 표출이다.

반면 그들이 기대치를 실현하지 못할 때는 실망을 주고 혐오감을 준다. 평소에 존경하는 사람이 그릇된 행동을 하면 그에 대한 실망은 거부감으로 이어지고, 거부감은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에 직결된다. 곧 혐오가 된다. 이 경우 혐오는 배신감의 다른 이름이다.

범부가 사회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드물지만, 사회적 명사나 공인들이 잘못된 행동으로 역겨움을 안겨주는 경우는 오늘 우리가 겪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이런 혐오감은 감정으로만 남지 않고 집단으로 상처받은 기억이 되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혐오감은 ‘사회적 트라우마’로 상기(想起)된다.

   
오늘날 존경심이 사라지고 혐오감이 만연하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는 뜻이며, 무엇보다도 미래 세대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뜻이다. 개별 갑질 사건들을 그냥 사건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그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철학자·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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