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을 계승한 한말의 대사상가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1803~1875)의 ‘명남루수록(明南樓隨錄)’에 나오는 한 대목을 소개한다. 최한기는 평생을 학문 연구와 많은 저술활동으로 동양·서양사상을 토대로 서로 상충되는 사상의 합의점을 찾아 한국 사상사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철학자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주변 열강의 사상이 밀려와 혼재된 시점의 대전환기였다. 그는 당대의 지성인으로서 개화사상을 전개해 새 사상의 기초를 유기론(唯氣論)에서 정립했다. 기철학(氣哲學)을 토대로 경험적 과학적 사상체계를 확립했다. 해방 후 초대 문교장관 안호상을 비롯한 미국 유학파가 문교 행정을 맡으면서 외세교육에 우리 사상은 사장됐지만, 실은 미국 경험주의보다 최한기의 경험론과 과학적인 사상이 앞선 순수한 토양 사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가 분수를 지키려고 하지 않아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최한기는 사람들의 헛된 마음을 지적한 가운데 “허령(虛靈)으로 으뜸을 삼는 사람은 마음에 한 가지 때 묻음도 없는 연후에 만물이 다 즐거울 수 있다고 말한다. 혹은 깊은 산속에 살면서 산짐승과 벗을 삼고 혹은 바닷가에 살면서 어부로 살면서 스스로 즐거움이 있어서, 쾌히 빈천(貧賤)은 슬픈 것임을 알지 못하고, 부귀를 부러워할 줄을 모르고 산다. 무릇 사물이 견문(見聞)에 부딪히는 것이 그 마음을 즐겁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은 모두 허락(虛樂)이다. 즐거움이란 다만 만들기에 따라서 다를 것이기에 체험을 얻어서 맥락을 찾을 뿐이니 부귀와 빈천은 자기 분수를 지켜서 그 즐거움을 누릴 것이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타고난 품성의 차이가 없음을 기뻐할 것이요, 온 나라의 정치와 교화는 진실로 치평(治平)을 미리 도모하지 않고는 같이 됨을 기뻐할 수 없으니, 지금 헛된 즐거움을 점차 줄이면 금일 이후로는 실락(實樂)이 전달되어서 저절로 많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헛된 즐거움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최한기가 살았던 구한말과 오늘이 다를 바 없으니 참조가 될 만하다. “가르침(인간교육을 말함)이 가정에서 베풀어지지 않으면 친애(親愛)가 멀어지고, 지방 행정이 고을에서 닦아지지 않으면 장유(長幼)가 어긋나고, 군대가 말을 아니하면 여러 사람을 이끌 수 없으며, 손님이 말을 아니하면 예(禮)를 이를 수 없고, 고위공직자가 자기 주장이 없이 남의 말만 듣고 따라가기를 좋아하면 국가의 계획을 정하고 국민을 화목하게하기 어렵다. 오늘날 헛되게 잡스러운 것을 버리고 정실(精實)을 지켜야 할 시기다.”
진정한 즐거움은 즐거움을 못 누린 다음에야 찾게 되는가. 이것을 지식으로 아는 것인가 아니면 깨달음으로 알 수 있는가. 산속에 들어가서 사는 자연인의 생활상을 방송에서 보면 하나같이 도시 생활에 지쳐 심신이 고달픈 사람들이 찾는 마지막 삶의 안식처로 외딴 산속에서 은거하고 있다. 자연인의 시초는 백이 숙재의 정신을 이어받은 고려 말 두문동 72현을 들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조선 중기 잦은 사화로 벼슬을 단념하고 수양과 독서로 생을 보냈던 사림(士林)의 선비가 있다.
진정한 자연인은 어디서 살든 간에 가장 존중해야 할 가치관인 지성 양심 자유에 대한 존엄(尊嚴)일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산속에 홀로 살아도 허락에 지나지 않는다. 지성이 필요로 하는 것은 법이다. 그리고 법은 양심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양심은 인간의 무관심으로 습관으로써 덮어둔다면 그 빛을 잃어가게 된다.
김수환 추기경은(창조지,1972, 권두언) “무관심의 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남명은 허명(虛名)으로 출세하는 관리가 싫어서 지리산 밑에 빈손으로 들어가서 후학에 전념했다.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남명의 고명(高名)을 듣고 참봉 벼슬을 천거하며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할 때 보겠다”는 말로 거절했다. 얼마 후 단성 현감을 조정에서 임명하자 상소문을 올려 관직에 나아갈 수 없음을 소명하고 국정을 바로 세울 것을 호소하였다.
요즘 자칭 지역을 대표하는 지도자임을 내세우는 입후보자가 넘치고 있다. 이 중에서 몇 사람이나 국민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지성과 양심을 갖춘 인물이 나올지 자못 기대되면서도 염려가 된다. 국민에게 잠시 위임받은 특권을 권력으로 착각하는 정치꾼은 없는지 살펴 볼 일이다. 학력과 경력을 내세우며 우쭐해하는 후보자도 보인다. 이것은 그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는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지 사람됨을 알아보기에는 부족하다. 허명(虛名)은 허락(虛樂)으로 연결된다. 지성과 양심을 지키는 인물이 선출되어 모든 사람을 실락(實樂)하게 해주길 기대해 본다.
남명학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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