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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칼럼] 판사님,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4-19 19:36:10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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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서울시경에 막 근무했을 때 강간죄가 강력계 소관인 5대 강력범죄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조금 의아했다. 오해는 마시라. 그때는 상해가 수반되지 않은 단순 강간은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처벌되는 친고죄였기에 일선 경찰서 형사들에게 그리 중(重)하다는 감각이 다소 떨어졌다. 얼마 뒤, 강도강간 사건의 현장을 조사하며 피해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범인을 체포해 현장검증을 하며 강간이 얼마나 중한 범죄이며 피해자의 상처는 평생토록 아물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상해가 동반되지 않은 강간이라고 상처가 다를 리는 없다. 그럼에도 단순 강간을 친고죄로 하였던 것은 입증의 어려움과 그 과정에서 야기되는 피해자의 곤경을 고려한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만의 은밀한 공간, 강압이 있었다는 구체적 증거 없이 상반된 주장뿐이라면 정황으로는 강압을 확신하는 형사도 막막하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상황을 낱낱이 캐물어 정황을 좀 더 구체화하는 것인데 피해 여성뿐 아니라 형사도 민망하고, 또 다른 가해가 될까 봐 한계가 있다. 게다가 힘 가진 가해자라면 화간을 주장하며 피해자를 꽃뱀으로 모는 것도 다반사였으니 그 뻔뻔함에 분노하면서도 법의 한계에 제 복장만 치는 것이 현실이다.

모두가 뻔히 아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하물며 ‘위계 또는 위력에 의한 간음죄’ 입증의 어려움은 어떠할지 염두에 두자는 뜻에서이다.

역시나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되었고, 당사자는 자신의 형사적 무죄를 입증하겠다고 밝혔으니 앞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긴 재판이 이어질 것이다. 이미 그는 국민과 자신의 가족에게는 사과했지만 피해자에게는 “모두가 내 잘못이다”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얼버무리며 직접적 시인은 하지 않고 있다. 괘념치 말아야 할 일을 감히 드러내 곤경에 빠트렸으니 죄가 되지 않는 일로 만들어 보여 징치하겠다는 상전의 뜻 같아 제3자 입장에서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어쨌거나 대다수가 죄라고 생각하는 짓을 아니라고 만들자면 피해자가 어떤 곤욕의 2차 피해를 볼지 불 보듯 환하지만 그게 위계간음죄에 있어 상례였다. 구속영장이 기각되던 그날, “위력 간음 등의 경우 기본적으로 불구속 수사가 원칙인데 검찰이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는 대한변협 수석대변인 출신 변호사의 인터뷰 기사가 생생한 증거다.

기가 찰 노릇이다,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라니! 아니, 맞다. 모든 수사는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다. 다만 죄의 사안이 중하거나, 증거인멸이나 도망의 염려가 있으면, 재판이 확정되기 전에는 무죄로 추정되는 인권의 대원칙에도 불구하고 일시 인신을 구속하여 재판을 받게 하고, 무죄로 확정되면 국가는 인신구속에 대한 배상의 책임을 지는 것이다.

먼저 ‘사안의 중함’을 따져보자. 단순 강간, 강간상해, 강도강간, 강간살인, 위계 등에 의한 간음에 있어서 강간 또는 간음 그 자체에 경중의 차이가 있을까? 물리적 폭력이 수반되거나 되지 않았거나, 피해자의 충격과 수치심, 그리고 그 기억의 상처는 결코 다를 리 없다. 그렇다면 강간 또는 간음이 중하지 않은 사안이라는 것인가? 그에는 감히 누구도 중하지 않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위계 등에 의한 간음은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라는 저 발상은 무슨 근거인가. 위계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처지에서는 물리적 폭력이 없었다는 것만으로 중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오히려 아무런 항거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몰린 사람의 모멸감과 상처가 더 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 도망은 각각의 경우가 다르니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증거인멸의 우려를 따져보자. 특히 진술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단순 강간이나 위계 등에 의한 간음의 경우, 길고 긴 수사와 불구속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와 가해자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힘들까? 행위 자체를 부인하거나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며 여러 정황을 늘어놓는 가해자와 속살을 드러내는 수치심을 감수한 채 방어해야 하는 피해자. 기막히지 않은가, 가해자가 공격하고 피해자는 방어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라니. 하지만 실상이 그렇다. 그런 처지에서 위협이 계속되고 회유가 더해지면 어찌 될까. 필경은 방어하는 쪽이 먼저 지치고 손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물적 증거가 빈약한 강간, 특히 위계 등에 의한 간음에 있어서 불구속은 증거인멸을 더욱 용이하게 해주는, 힘 있는 자에 대한 부당한 선처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미투(#MeToo)’운동을 권력게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권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꺼림칙하지만 기본적으로 맞다. 여태, 어쩌면 수천 년 동안 기울어진 무대에서 우월적 권력을 누렸던 쪽에 이제 공정한 무대로 내려오라는 것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정의롭지도 못하다. 그러고 싶지만 맞닥트리면 외면하거나 비루해지기도 하는 것이 쪽팔리지만 현실의 삶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불공정한 무대의 불안 때문에 망설이는 세상은 이제 그만이어야 하겠다.

자, 권력게임이란다. 그럼 올바른 권력이 바르게 앞서줘야 한다. 지난 이 지면에서 ‘판사님, 누가 약자인가요?’ 물었더니 ‘다퉈볼 여지가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판사님,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긴, 피해자가 진술 중인 검찰청사로, 부르지도 않았는데 당당히 들이닥치고, 검찰은 영장신청을 서두르고, 기각당하는, 일련의 과정이 오해이길 바라지만 그들만의 리그 같아 보였다. 그렇지만 ‘다퉈볼 여지’는 정말 너무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은 모든 사건이 다퉈볼 여지가 있기 때문에 나온 말 아닌가. 그럼 아예 구속영장 제도를 폐지해야지.

권력이 권력을 내려놓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만 법의 마지막 보루가 약한 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면 기대는 또 절망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다행히 대법원에서 ‘성희롱 관련 소송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판례가 나왔다니 모두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미투, 파이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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