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지게 핀 봄꽃을 시샘하듯 찬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4월 어느 저녁, 부산 서면 소민아트센터에서는 100여 좌석을 가득 채운 부산 시민과 시인들이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이 아니라 이재무 시인이 손수 짓는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한 상을 앞에 놓고 진한 봄의 향기에 젖어들고 있었다.
이날 초대된 이재무 시인은 구름을 밀며 나는 새에 밑줄을 긋고, 바람 없는 날 비단실처럼 흐르는 강물에 밑줄을 긋고, 자라처럼 목을 어깨에 감추고 언덕길에 숨을 질질 흘리는 노인의 신발 뒤축에 밑줄을 긋고, 늦은 밤 방범창을 타고 넘어오는 이웃집 여인의 가느다란 흐느낌에 밑줄을 긋고, 하늘 정원에 핀 별꽃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시를 쓴다고 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밤인가?
문화라는 것이 그렇다. 삶이 힘들거나 밋밋할 때, 야구나 축구 경기를 보며 몇 번 함성을 지르거나, 극장에 가서 재미있는 영화를 한 편 보거나, 마음이 가는 책 한 권을 읽은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도 문화생활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왜소해져 가고, 그중에서도 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더욱 그렇다. 문학이, 시가 왜 소외되어 가고 있을까?
현대인은 갈수록 영상매체에 빠져들어 문학을 멀리하는 추세이고, 또 시는 갈수록 어려워져 시인들만의 전유물이 되거나, 빵틀에서 찍어낸 붕어빵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되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후자의 식상한 시에 대해서는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전자에 대해서는 공감각의 확장이나 세월이 흐를수록 더 먼 곳의 이미지를 끌어와 시를 지어야 하는 현대 시인들의 고충을 생각할 때, 당연한 진화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측면도 있겠다. 현대사회에서 시는 꼭 필요한가?
인간은 언어공동체이고, 시인은 언어의 집을 짓는 목수라 할 때 시는, 시인의 존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변혁의 가장 앞자리, 목숨 걸고 뼈대를 세워야 하는 맨 앞자리에 시인이 존재했다. 이는 시인이 본시 그러해서가 아니라 심상(이미지)을 멀리서 끌어와야 하는 숙명 때문에 사고가 필연적으로 깊어진 덕분일 것이다.
이러한 시를 가지고 시민이나 시인들을 상대로 시 문화 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부산에도 있다. 이 가운데 필자가 몸담은 부산시울림시낭송회는 서정시뿐만 아니라 현대시까지 아우르는 깊이 있는 시를 다루는 시모임이다. 부산시울림시낭송회는 2002년 4월, 그 당시 부산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고 (故)이해웅 시인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 목적은 시문학을 통해 시민의 정서순화에 기여하고, 기존 회원 및 부산 중견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하는 데 두었다. 설립 직후 첫 1년은 광복동 국제아트홀에서 낭송회를 개최하였고, 2003년 4월부터는 서면 영광도서 4층 사랑방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동안 장석남 정호승 김용택 문정희 문태준 천양희 김신용 손택수 안도현 문인수 박형준 오탁번 이승훈 송찬호 김명인 김사인 강은교 유홍준 장옥관 등 많은 시인이 초대되어 부산의 밤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그리고 2016년부터는 명망이 높은 오정환 시인이 회장을 맡아 약 2년간 모임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애를 쓰다 오 시인은 지난 1월 뜻하지 않는 변고로 애석하게도 유명을 달리하셨다. 그 뒤 이정모 시인이 회장을 이어받아 이끌고 있다.
회원들은 2018년 운영 방침을 기존 낭송에서 낭독콘서트로 전환하여 질적 향상을 꾀하기로 했다. 이재무 시인 초대행사에서 보듯 단순한 낭송이 아니라 시민과 시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극, 콘서트의 형식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재미를 보여주었다. 기획을 맡은 손순미 시인의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우리의 정신 건강은 누가 지켜줄 것인가. 일에 허덕이다 일생을 다 허비하고 최후의 순간을 맞는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펄벅의 말처럼 고통의 순간에도 기쁨은 있다. 우리는 삶의 힘든 순간에도 자투리 기쁨을 찾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여기에 많은 길이 있을 것이고, 그중 하나는 시가 될 것이다. 시인이 산고를 겪고 낳은 시를 인터넷에서 함부로 도용하지 말고, 소중한 아기 다루듯 진솔한 자세로 이름을 불러주고, 그 아이를 낳은 시인의 이름을 함께 인용한다면 더 행복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남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다른 사람 또한 나의 이름을 불러주어 내가 더는 외롭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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