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은 ‘인간의 무늬’다. 몸에 새기는 문신도 인간의 무늬이기도 하지만, 영혼을 새기는 도서(圖書)도 인간의 무늬라고 할 수 있다. 도서를 인문학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정신의 무늬를 새기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근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만물이 각자의 무늬를 가지고 있듯이 인간들도 각자의 무늬를 가지고 있다. 만물의 무늬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만들어지는 것도 있다. 인간의 무늬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서서히 완성된다. 이 때문에 인문학은 자연의 질서에 따라서 오래도록 곰삭아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인문의 근원이 자연의 질서에서 비롯하고 있다면,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일이야말로 인문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연구하는 인문학은 순수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학문일 것이다. 인문학이 융성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초 학문이 튼튼한 토대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인문(人文)에서 인(人)은 사람을 말하고, 문(文)은 말 그대로 세상 만물의 근원을 이루는 모든 무늬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협은 ‘문심조룡’에서 모든 만물의 근원은 문에 있다고 전제하고 그 문의 원리를 ‘원도(原道)’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첫머리에 문장의 도리를 제시하고 있다.

“문(文)이라고 하는 특징은 크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원리와 함께 만들어졌다. 어째서 그런가? 하늘과 땅의 구별이 생기면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난 체제로 나누어졌다. 해와 달은 아름다운 옥을 겹쳐놓은 것과 같이 하늘의 형상을 아름답게 드리우고 있다. 산과 하천은 꽃무늬를 새겨놓은 비단과 같이 빛나서 땅의 형상에 두루 펼쳐져 있다. 이것이 대개 자연의 도(道)라고 하는 문장이다.”

인문(人文)의 근원을 이루는 문장은 자연의 도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문자가 천지자연의 형상을 그린 도형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한자의 여섯 가지 구성 방법인 상형(象形) 지사(指事) 회의(會意) 형성(形聲) 전주(轉注) 가차(假借)는 자연의 형상을 점차 확장하면서 만들어졌고, 한글은 천지인(天地人) 삼재의 형상을 본떠서 모음을 만들었고 사람의 입 모양을 본떠서 자음을 만들었다. 이들 문자는 모두 자연의 형상과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원리를 상징으로 설명한 ‘역경(易經)’은 하늘의 형상을 상징하는 양의 효를 만들고 땅의 형상을 상징하는 음의 효를 만들어 만물이 변화하고 유동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역경’의 효사가 무궁한 의미를 만들어내듯이, 만물은 자연스럽지만 그 자연스러움에는 오묘한 원리가 숨겨져 있어서 아무리 캐내어도 다 설명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무궁할 따름이다. 이 무궁한 우주 만물의 원리를 밝히는 일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이 영원히 풀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현대의 인문학은 어떠한가. 자연의 원리는 무궁해서 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문학은 이미 고사(枯死) 직전에 놓여 있다. 각 대학의 인문학부는 이미 폐과의 운명을 걷고 있으며, 자연과학은 실용과학과 응용과학에 밀려나고 있다. 대학은 말 그대로 큰 학문을 연구하는 곳이다. 그곳은 학문의 근원을 탐색하는 곳이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곳이고, 무궁한 자연의 원리를 연구하는 곳이다. 인문학의 죽음은 결국 인간 존재의 근본과 자연의 원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대학은 당장 눈앞의 이익과 편리를 추구하면서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인문학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 사이에 끝없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가엾은 영혼을 보라. 현대의 삶이란 말 그대로 인문학의 죽음에 따른 인간성이 매몰되어가는 폐허의 현장일 따름이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달이 뜨는 것은 만유불변의 원리이다. 저녁이 사라진 자리에 불야성(不夜城)이 있고, 아침이 사라진 자리에 바쁜 현대인의 초라한 군상만 떠돌고 있다. 밤을 연장하면서 인간의 몸과 영혼은 자연의 질서를 잊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건강한 아침을 맞이할 수 없게 되었다. 해가 지면 활동을 멈추고 해가 뜨면 활동을 하는 것이 자연에 따른 인간의 삶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기본 질서가 해체되면서 인간의 삶은 영혼이 없이 떠도는 아침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자연의 질서에 따라 건강하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출발이 아닐까. 새벽에 먼 곳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만물이 깨어나듯이 건강한 아침을 맞이해보자. 이런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인문학이 시작된다. 먼 곳에서 인문학을 말하기 전에 새벽을 선생으로 삼고, 밤을 선생으로 삼아서 자연의 질서에 따른 삶을 회복하는 길, 여기에 인문학이 있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