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추위와 때이른 더위 사이에 예년보다 봄이 짧아졌다. 짧은 봄 동안에도 겨울 같은, 또 여름 같은 날씨가 오락가락해 종잡을 수 없다. 봄은 금세 왔다가 가지만 그 짧은 동안에도 어김없이 꽃은 피고 사람들은 겨우내 참았던 나들이에 한꺼번에 나선다. 이런 꽃놀이는 3월 중순 남도에서부터 시작해 날짜가 지나며 빠른 속도로 북상한다. 여행과 산행 취재를 핑계로 일삼아 나들이삼아 올봄에는 참으로 많은 곳에 꽃구경하러 다녔다. 광양 매화마을을 시작으로 노란 꽃이 산비탈을 가득 채운 구례 산수유마을에 이어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의 산 화왕산을 찾았다. 또 벚꽃에 이어 최근에는 경북의 복사꽃까지 온 산하를 색색으로 물들이는 꽃의 향연을 즐겼다.

봄꽃 명소 가운데는 별다른 행사가 없어도 상춘객이 ‘알아서’ 찾아와 꽃을 보고 가는 곳도 있지만 광양이나 구례, 하동처럼 개화 시기에 맞춰 축제를 여는 곳도 많다. 그런데 여전히 꽃은 산야를 화려하게 장식하지만 이런 축제가 얼마나 충실한 콘텐츠를 갖추고 사람들을 맞는지는 의문이다. 뜻하지 않게 광양 매화마을을 축제가 열릴 즈음 세 차례나 찾았다. 이곳의 매화는 명불허전이다. 섬진강변의 산비탈과 좁은 들판을 모두 매화로 물들이기까지 수십 년에 걸친 주민들의 노고는 빠트릴 수 없다. 포털 검색 창에 광양이라고 치면 자동 완성 문장 윗줄에 ‘광양 매화’가 떠오를 정도다. 그런데 너무 유명해져서일까. 매화의 매력을 온전히 느끼기에는 주변이 너무 어수선해 보이는 건 기자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수수하지 않으면서 또 너무 과하게 화려하지도 않은 은근한 아름다움이 매화의 매력인데 축제장은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처음 개막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이곳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간이 식당이고 들리는 건 요란한 음악이었다. 매화는 피지도 않고 축제는 한참이나 남았는데 ‘자리’는 이미 다 마련돼 있다. 바로 놀고먹고 마시는 자리다. 일 년 중 축제를 즈음한 딱 두 주 정도만 제대로 쓰이는 넓은 주차장 한쪽에는 다양한 판매 부스가 설치돼 있었다. 인접한 별도의 공간을 점거한 대형 천막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매화마을 도로 옆과 마을 안 좁은 골목에도 먹을거리를 파는 임시 가게들이 줄줄이 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전국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열린 구례 산수유 축제 현장도 닮은꼴이었다. 몰려드는 차량과 임시로 만든 음식점, 공연장 등 ‘꽃만 다를 뿐’ 흡사한 장면이다.

봄꽃 축제의 현장에 활짝 핀 꽃이 있으면 충분하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부대시설과 행사가 지나치다면 곤란하다. 축제의 현장에서 꽃도, 주민도, 관광객도 주연이 되지 못하고 한쪽에 밀려난 느낌이다. 먼 길을 달려온 관광객들은 특별한 경험, 특별한 기억을 담는 자리가 되어야 할 터인데 오로지 바쁘게 찍은 사진으로만 봄꽃 축제를 소비할 뿐이다.

비슷한 일을 하동에서도 볼 수 있다. 이달 초 하동에서는 화개장터 벚꽃축제가 열렸다. 섬진강과 화개천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아름다움은 따로 설명할 필요 없을 정도다. 그런데 하동군이 생각하는 벚나무란 관광객을 부르는 수단에 그치는 것으로 느껴진다. 하동군은 벚꽃축제를 앞두고 악양면 평사리공원 앞 19번 국도변의 아름드리 벚나무 수십 그루를 잘라냈고 앞으로 수 백 그루를 더 베어낼 계획이다. 어른이 혼자 안기에도 모자랄 정도로 큰 벚나무들이 벚꽃잎을 휘날리는 대신 둥치만 남았다.

19번 국도는 섬진강을 따라 40여 ㎞를 달리는데 이 가운데 하동읍에서 화개시장까지가 벚꽃 길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구간의 벚나무 가운데 상당수가 벚꽃 구경을 위해 잘려나갔으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다. 이 공사 구간에서는 지난해에도 베어낸 나무 대신 새로 심은 왕벚나무가 무더기로 고사해 논란이 됐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극찬한 길은 이제 없다. 오늘의 19번 국도는 더는 예전의 그 아름다운 길이 아니다. 해마다 때가 되면 열리는 꽃 축제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열리는 것일까. 개화 시기에 맞춰 열던 축제를 더는 열지 않고 차분하게 봄맞이를 하는 지역에서 배울 일이다.

생활레저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