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부자들’(2015년)에는 살벌한 극 분위기와는 다른 이색 장소가 나온다. 늦은 밤 조승우(우장훈 검사 역)가 이병헌(정치깡패 안상구 역)을 데리고 시골길을 운전해 찾아간 그곳, 헌책방이다. 그의 아버지 집으로, 미로 같은 공간에 산더미처럼 쌓인 책이 이채롭다. 산속에 꾸민 세트장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곳이다.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 있는 새한서점. 소장 서적만 13만여 권이다. 외진 이 마을은 영화와 책방 덕에 관광 명소가 됐다.

1999년 개봉된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에도 헌책방 풍경이 등장한다. 극중 최민식(서민기 역)이 책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다. 그는 실직 후 새 직장을 구하느라 괴로운 나날이지만, 헌책방에 오면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다. 그곳이 둘도 없는 마음의 안식처인 셈이다. 허영숙 시인이 ‘헌책방에서’라는 시에 적은 것처럼, 그도 손때 묻은 책들을 보며 모든 새로운 것을 향한 욕망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졌을지 모른다.

영화 ‘변호인’(2013년)에서는 송강호(송우석 변호사 역)가 헌책방에서 자신이 팔았던 고시책을 다시 사는 장면이 인상 깊다. 그 헌책으로 열심해 공부해 결국 고시에 붙었으니 말이다.

고시책을 사는 그 장면이 촬영된 곳은 국내 유일의 헌책방 거리로 이름난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 1950년 6·25전쟁 때 피란민과 미군부대의 책 등을 내놓고 팔면서 형성된 곳이다. 1960~80년대 전성기에는 책방 수가 70~100곳에 이르렀다. 가난했던 시절 학생과 서민에게는 지식·정보의 수원지이자 보물창고였다. 이제는 부산의 대표적 관광코스로 꼽히고, 해마다 문화제도 열린다. 하지만 경영난과 임대료 상승 등으로 폐점이 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구가 부산시 교부금 5억 원으로 책방골목 환경개선사업을 벌인다는 소식이다. 광장과 벤치, 서점 정보제공 겸 쉼터 기능의 안내소를 조성하고 옛날 돌계단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생존을 위한 새로운 변화인 셈이다. 그간 활로를 모색해왔지만, 사진 찍고 가는 관광객만 늘었다는 볼멘소리가 들린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피란수도 부산이 남긴 흔적이고 우리 현대사의 문화유산이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통로와도 같다. 그런 만큼 책방골목의 추억과 향수를 그대로 간직하면서 책을 사고파는 고유기능도 되살리는 지혜가 모아져야 하겠다.

구시영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