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벚꽃 천지다. 연분홍 살짝 배어든 유백색 고깔을 쓴, 승무 추는 비구니 같은 벚나무가 거리마다 줄지어 서 있다. 소설 속 구보 씨가 그 옛날 여름날 경성 거리를 걸었듯, 배낭을 멘 쉰여덟의 늙은 구보가 부산의 봄을 걸었다. 피고 지고 돋고 생기가 흐드러진 꽃의 향연이다. 이 따끈한 봄볕 한 줄기 외 우리 생에 더 바랄 게 있을까 싶다.


사월이다. 죽은 땅에서 생명을 깨워내는 산고의 계절이다. 사월 어느 날 남과 북이 마주 앉을 판문점에서도 라일락은 과연 피어날 것인지. 죽은 땅속 생기 없는 뿌리를 일깨울 봄비는 내릴 것인지. 우리 예술단의 평양 공연 제목처럼 봄이 온다. 빛나는 꿈의 계절,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에 꽃잎이 하르르 떨어져 얼굴에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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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세상은 벚꽃 천지였다. 군항제 열리는 진해 아니면 또 어떠랴. 부산 역시 ‘황홀한 지옥’을 연출했던 터였다. 남천동, 사직동, 온천천, 그리고 내가 나가는 학교의 캠퍼스…. 연분홍이 살짝 배어든 유백색 고깔을 쓴, 승무 추는 비구니 같은 벚나무가 거리마다 줄지어 서 있었다. 꽃이 피니 살풍경한 부산의 거리가 한결 인간의 표정을 보여주는 것도 같았다.

높다란 건물에 가려 응달을 면치 못했던,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의 ‘거인의 화원’처럼 겨우내 춥고 황량했던 내 집에도 더딜망정 봄이 왔다. 삼월 들어서자 손톱만 한 뜨락에서 동백이 붉게 피었다. 그 동백, 봉오리째 툭툭 분질러져 장렬하게 흩어질 무렵 눈부시게 하얀 ‘목련(木蓮)존자’가 찾아왔다. 화분에 담긴 천리향도 자줏빛 꽃잎을 수줍게 펼쳐 보였다. 내 누옥을 등불처럼 환히 밝히던 목련이 삽시간에 떨어졌을 때 내심 섭섭했다. 그래도 아왜나무가 쌀알 같은 꽃잎을 피워내려고 눈록빛 새순을 삐죽삐죽 내밀고 있으니 만기가 다가온 적금통장을 쥔 주부의 심정이 된다.

소설가 구보(仇甫) 박태원(朴泰遠·1910~1986)은 1938년 여름날 경성 거리를 걷는다. 룸펜과 다름없는 소설가 구보 씨는 그 하루 숱한 인간 군상과 마주친다. 언젠가 선을 봤던 여자를 전차에서 발견해 그 뒷모습을 훔쳐보며 중학생 시절 짝사랑했던 친구 누나를 떠올리기도 하고, 초라한 입성의 옛 동무와 마주치는가 하면, 금 노다지깨나 캔 듯 온몸에 성공한 티를 줄줄 흘리는 졸부 친구에 이끌려 찻집에 간다. 호구지책으로 살인사건을 취재해야 하는 사회부 기자의 삶을 모멸하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입에 담는 시인과도 시간을 보낸다. 밤엔 맥주를 마시다 어린 여급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딱지 맞고 귀가한다.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란 중편소설에서 펼쳐 보인 경성의 풍경은 물신주의가 배여 있는, 적당히 비속하고 적당히 타락한 식민지의 얼굴이다. 식민 통치에 익숙해진 소설 속의 군상은 다들 범속하고 몰개성적인 얼굴을 갖고 있다.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역시 풀기 없이 세파에 쓸린 삶을 꾸역꾸역 꾸려가고 있는 것.

어떤 봄날 오후, 소설가 구보가 부산 거리를 걷는다. 단장을 짚은 스물다섯 살 소설 속 구보 씨가 아닌, 배낭을 멘 쉰여덟의 늙은 구보다. 그는 온천천으로 길을 잡아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다. 그곳 역시 벚꽃 천지다. 한편 꽃이 피고 한편 꽃잎이 비처럼 쏟아진다. 꽃 진 자리엔 연한 새잎이 불쑥 솟아난다.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이 가득하다. 손을 맞잡고 느릿느릿 걷는 노부부, 유모차를 미는 젊은 부부, 막 소개팅이라도 한 듯 약간의 사이를 띄운 채 걷는 정장 차림의 선남선녀…. 교복 입은 소녀들의 웃음이 하늘로 튀어 올라 분수처럼 흩어진다.

일제 치하의 구보는 청계천변에 사는 하층민들의 일상을 파노라마처럼 펼친 ‘천변 풍경’을 썼지만, 이 구보는 그럴 작정도 없이 천변의 사람들을 휘 둘러본다. 걸음을 멈추고는 얕은 수면을 푸드덕거리는 팔뚝만 한 잉어 떼도 내려다본다. 멀리 떡갈나무에도 새잎이 돋아나고 능수버들은 푸른 머리칼을 늘어뜨렸다. 유채꽃 노란 원색이 환하다. 바람이 불어 땅을 하얗게 뒤덮은 꽃잎을 돌돌 말아 굴린다. 문득 오래된 시 한 편이 떠오른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문 고양이 입술에 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식민 치하 시인의 눈에도 봄은 경이로웠던가. 부산의 구보도 페르시아고양이 털처럼 유미적인 사월의 햇살을 실눈 뜨고 치어다본다. 눈부신 하늘을 배경 삼아 구름처럼 피어나는 벚꽃의 관능. 조건반사처럼 또 다른 시가 떠오른다. ‘두 사람의 생, 그사이에 활짝 피어난 벚꽃이여’. 일본 에도시대의 방랑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하이쿠 일절. 냇물에 동동 떠가는 꽃잎처럼 흘러간 젊은 시절이, 그 누군가와의 사이에 화르르 쏟아지던 꽃비가 떠오른다. 흰 잇바디를 드러내며 까르르 웃던, ‘그러한 내가 잠시 알던 정원의 초목같이 자라던 소녀(박인환 ’목마와 숙녀)’의 깨끗한 쌍꺼풀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갑자기 삶이 속절없어진다.

풍경이 지나치게 황홀하면 감각이 피로해진다. 구보는 온천천을 벗어나 도시철도로 간다. 글쎄, 이런 날은 다대포 몰운대 벼랑에 서서 아지랑이 내리는 바다 건너 영도를 하염없이 바라보아도 좋으리라. 혹은, 저물녘까지 낙동강 검은 강물을 물끄러미 내려다봐도 좋으리라. 맞은편 플랫폼의 승객들이 어깨를 옹송그리고 있다.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에즈라 파운드 ‘지하철 정류장에서’)이 아닐는지.

구보는 덜컹거리는 지하철 귀퉁이에 끼여 앉아 배낭에서 소설책을 꺼내 읽는다. ‘인간은 날 것으로 먹어야 할 음식을 일부러 삶아보기도 하고, 구워보기도 하고, 식초로 무쳐보기도 하고, 된장을 바르기도 하는 등 굳이 쓸데없이 수고를 해가며 서로 좋아한다. 입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양이처럼 일 년 내내 같은 것을 입고 지내라고 하면 불완전하게 태어난 그들로서는 좀 무리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저렇게 잡다한 것을 피부 위에 얹고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한 구절. 이 따끈한 봄볕 한 줄기라면 우리 생에 더 바랄 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글쎄, 비싼 외제 차를 타면 안락해지는 만큼 잃는 것도 많을 터. 짙게 선팅된 차 안에서 어떻게 화사한 봄꽃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을까. 유령처럼 나타나는 까맣게 젖은 얼굴들을 어떻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하고 보면 우리네 사는 꼴이 다 그렇질 않나. 희뿌연 미세먼지를 닮은 아우성이 이제 확성기를 타고 귀청을 때리리라. 뽑아주기만 하면 단번에 세상을, 우리네 찌든 삶을 바꿔주겠다는 사람들. 그들이 우리에게 해 주겠다는 건 따지고 보면 날것으로 먹어야 할 걸 억지로 삶고, 굽고, 된장을 바르는 일이 아닐는지. 여담이지만, 4년 전 선거에서 당시 집권당은 대통령이 눈물 흘리는 사진을 거리 곳곳에 내붙였다. ‘국민 여러분,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주세요’. 글쎄, 대통령이 국민의 눈물을 닦아줘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줘야 했을까. 세월호 침몰에 눈물 흘렸다던 그 대통령은 온종일 침실에 틀어박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지 않았나. 그건 희극일까, 비극일까. 이번엔 그런 코미디에 속지는 말아야 할 텐데.

사월이다.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이랬던가.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 사월이 잔인한 것은, 죽은 땅에서 생명을 깨워내는 산고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월 어느 날 남과 북이 마주 앉을 판문점에서도 라일락은 과연 피어날 것인지. 죽은 땅속 생기 없는 뿌리를 일깨울 봄비는 내릴 것인지.

엘리엇은 이렇게도 노래했다. ‘고요히 흘러라 템스강이여, 내 노래 끝날 때까지. 강물 위엔 빈 병도, 샌드위치를 쌌던 종이도, 명주 손수건도, 담배꽁초도 그 밖의 다른 여름날의 증거품도 아무것도 없다. 요정들은 떠나갔다. 그리고 그녀들의 친구들, 도시 중역의 빈들거리는 자식들도 떠나갔다. 주소도 남기지 않고. 르망 호숫가에 앉아 나는 울었다. 고요히 흘러라, 템스강이여’. 이제는 아우성을 멈추고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때, 겨레의 평화를 위해 두 손을 모을 때. 하고 보면 우리 예술단이 평양서 했던 공연 이름도 ‘봄이 온다’가 아니었던가.

구보는 어두컴컴한 지하철역을 빠져나온다. 기습하듯 봄에 겨운 저녁 햇살이 얼굴을 찌른다. 문득 카톡이 울린다. 먼 곳에서 일하는 친구가 찍어 보낸 복사꽃이 소담하다. 또 다른 친구는 자갈치 시장을 뒤져 맛있는 회를 직접 쳐놓겠으니 봄밤 집에 놀러 오라고 척독(尺牘)을 남겨 놓았다. 봄이다.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계절, 빛나는 꿈의 계절,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이다. 꽃잎이 하르르 얼굴에 내려앉는다.

소설가·경성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