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14일 당시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 연설회에서 박근혜 후보가 포문을 열었다. “검찰이 도곡동 땅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땅 판 돈에서 매달 수천만 원 현찰이 빠져 나갔는데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의문이라고 합니다.” 사흘 뒤 연설회에서 이명박(MB) 후보도 사자후를 토했다. “도곡동 땅이 어떻다고요? BBK가 어떻다고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저는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이에 앞서 두 달 전엔 이명박 캠프가 박 후보를 향해 공격에 나선 바 있다. “박 후보와 관련된 의혹의 중심에 늘 최태민이 있었다. 아직도 최 씨의 딸과 사위인 정윤회 씨가 박 후보를 돕고 있다.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최 씨 일가에 의한 국정 농단의 개연성은 없겠는가.” 박 후보는 이에 대해 “최 목사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이 왜 한 명도 없나. 실체 없는 네거티브”라고 부인하며 때론 이런 의혹 제기가 “천벌 받을 짓”이라고 거칠게 반응했다.
11년 전, 우리 헌정사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됐는지 모른다. 한나라당 경선 승리자가 사실상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두 예비후보는 같은 당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사생결단의 폭로전을 벌였다. 두 후보 모두에게는 질기디질긴 도곡동 땅 및 BBK 의혹과 최태민 일가 의혹이었다. 하지만 이 후보가 당선되면서 모든 게 묻혔다. 검찰과 특검은 BBK 사건과 MB는 관계가 없다며 면죄부를 줬다. 그렇게 박 후보의 최 씨 일가와 관련된 의혹도 잊혀져 갔다.
하지만 불행히도(?) 당시 잉태된 비극의 씨앗은 땅속에서 질긴 생명력을 이어오다 기어코 발아했다. 실체가 없다던 최 씨 일가 의혹의 싹은 최순실의 국정 농단으로 이어지며 박 전 대통령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모든 의혹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겠느냐던 MB마저 끝내 검찰 포토라인에 섰다. 그의 말마따나 이 모든 게 정치 보복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일단 제쳐 두자. 다만, ‘이명박근혜’로 상징되는 보수정권 9년의 공멸이 11년 전 서로의 이전투구에서 비롯된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20여 개에 달하는 MB의 혐의는 어지러울 정도다. 크게 보면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다스 140억 원 반환 개입 및 삼성의 다스 소송비 대납, 다스 실소유주 및 경영 비리, 이팔성 전 우리금융 회장 인사 청탁, 기타 차명재산 의혹 등이다. 혐의로는 뇌물수수, 직권남용, 공직선거법·대통령기록물관리법, 횡령·배임 등이다. 뇌물 액수만 100억 원을 넘는다. 특히 BBK 및 다스 관련 의혹은 웬만큼 꼼꼼히 살펴보지 않고는 흐름을 따라가기도 힘들 정도로 복잡하다. 그만큼 수법이 교묘하다는 이야기다. 그뿐 아니라, 다스가 BBK 김경준에게 떼인 투자금 140억 원을 돌려달라는 소송 과정에서 청와대와 국가기관까지 동원했다는 대목은 집요하면서도 지저분하기까지 하다.
지난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여론조작 사건이 불거졌을 당시, 정두언 전 의원의 MB 인물평이 눈길을 끈 적이 있다. 그는 “MB가 굉장히 신중하고 약았다. 자국 같은 거 잘 안 남겼다. 그거(증거) 나오기, 잡기 힘들거다”라고 수사 전망을 부정적으로 봤다. MB는 문제가 생기면 밑으로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여서 쉽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비록 정치적으로 덮인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간 BBK, 다스, 도곡동 땅 의혹 조사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걸 고려하면 일리가 없지 않다.
하지만 책임을 밑으로 떠넘기기 일쑤라는 MB의 습성이 끝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측근들이 잇따라 그에게서 등을 돌리면서다. 그것도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 김희중 전 대통령 제1부속실장,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 각각 그의 ‘집사’ ‘최측근’ ‘오른팔’로 불리던 핵심들까지 검찰에서 과거와 다른 진술을 했다. 무엇보다 검찰에 핵심 증언을 하기 전 “나도 살아야겠다”며 MB의 다른 측근에게 보냈다는 김희중 전 실장의 문자메시지 내용은 씁쓸하기까지 하다. 신중하긴 했으되 약아빠진 MB의 냉정함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만들어 낸 배경임을 짐작게 한다.
21시간의 검찰 조사에서 MB는 혐의 대부분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혀 모르는 일이고 설령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실무선에서 이뤄진 일”이라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예상대로다. 하지만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라던 11년 전과는 너무도 상황이 달라졌다. 누구보다도 그의 분신과도 같던 측근들이 먼저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보복이라기보다는 측근들의 보복이라 할 만하다. 밑으로 책임을 떠넘겨 온 못된 버릇이 초래한 업보다. 이런 판국이니 과연 이번에도 이 모든 의혹이 ‘새빨간 거짓말’일지 두고 볼 일이다.
논설실장 jj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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