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개봉된 영국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는 20세기 초반 참정권 쟁취를 위한 영국 여성들의 연대와 투쟁을 다루고 있다. 1903년 맨체스터에서 시작된 여성 참정권 운동의 중심에는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라는 강인한 인물이 있다. 합법적인 참정권 주장에 끄덕도 하지 않는 견고한 남성 중심 사회에 균열을 내기 위하여 영국의 여성 운동가들은 ‘폭력’을 선택한다. 가게 진열장을 깨뜨리고 우체통에 폭탄을 설치하며 여성 참정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한 것이다.

급기야 1913년 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Emily Davison)’이 한 경마대회에 잠입해 달리는 말 앞으로 몸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거대한 여성 참정권 시위장으로 바뀐 당시 데이비슨의 장례식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영국 정부가 여성 참정권을 수락한 것은 1918년이다.

미국 역시 여성 참정권이 부여된 것은 1920년 수정헌법 제19조가 발효된 이후이다. 당시 백인 여성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흑인 남성들이 이미 1870년 선거권을 부여받았던 사실을 감안하면 지독한 아이러니라고 하겠다.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 역시 연대와 투쟁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그 중심에 수잔 앤소니(Susan B. Anthony)가 있다.

여성들의 참정권 투쟁은 한 사회 내에서 남성과 동등한 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는 제도권 내로의 진입을 막아왔던 남성 중심 사회의 벽을 깨부수는 지난한 과정이기도 했다. 이 쉽지 않은 과정을 여성들은 연대의 힘을 통해 헤쳐 나왔고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다. 20세기 들어 남성과 동등하게 주어진 교육의 기회는 보다 많은 여성으로 하여금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공적인 사회로 진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벽을 깨고 진입한 수많은 여성들 앞에는 교묘한 성차별이 작동하고, 머리 위로는 여전히 눈에 잘 띄지 않는 ‘유리천장’이 존재한다.

할리우드에서 촉발된 ‘미투’(#MeToo) 운동이 대한민국에서 예기치 않은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적인 업적을 쌓아올렸던 문인과 연극인, 법조인, 정치인, 교육자들의 숨겨진 추한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어 충격을 주고 있다. 그들이 외형적으로 이루었던 수많은 업적을 발판삼아 자신보다 힘이 없는 대상에게 폭력적인 권력을 휘둘렀음이 낱낱이 밝혀졌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미투’ 고백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권력형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은 없었다는 자조적인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투 고백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위드 유’(#WithYou) 선언이 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미투 고백에 대해 공감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동참하는 것, 권력형 성폭력을 만들어 낸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피해자들을 돕고 또 이 사회를 보다 나은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다. 미투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고 사법 당국에 적극적인 수사를 주문한 대통령의 조치 역시 시의적절하다.

며칠 전 ‘영화성평등센터’ 개소식에서 영화배우 문소리가 “우리는 가해자이거나 피해자, 혹은 방관자였거나 암묵적 동조자였음을 영화인 전체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몇몇 사람이 아닌 전체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라고 밝힌 말은 의미심장하다. 우리 모두 주변에서 흔히 마주쳐 온 성차별적 관례에 대해 스스로 방관자나 암묵적 동조자는 아니었는지 엄정한 자기점검의 시간이 필요하다.

‘미투’와 ‘위드 유’ 선언은 습한 음지에서 은밀하게 반복되어 온 권력형 성폭력의 양상을 양지로 끌어내기 위한 연대의 과정이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연대의 힘밖에 없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다. 앞으로 여전히 터져 나올 미투 선언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며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또한 그릇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위드 유’ 선언에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참여도 독려하고 싶다. 그들이 사랑하는 여자 친구나 아내, 딸 역시 권력형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자각,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자각을 공유하였으면 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외곽지대에서 동남아 여성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이중적인 피해에 대한 관심 역시 필요하다.

100여 년 전 영국과 미국의 여성들이 강력한 연대를 통해 참정권을 획득하였던 것처럼 이제 우리 사회도 미투와 위드 유의 강력한 연대를 통해 남성과 여성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음습한 성차별적 기제가 작동하는 어둠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동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