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바나나는 정말 귀한 과일이었다. 그때 바나나 한 송이는 1만 원이 훌쩍 넘었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이 500원 정도였으니 얼마나 최고급 과일인지 알 수 있다. 그때 그렇게 바나나가 비쌌던 건 정부가 국내 과일농가를 보호하려고 엄격한 수입 규제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귀했던 바나나는 1991년 우루과이라운드로 수입 규제가 철폐되면서 이제 저렴한 과일의 대명사가 됐다.

유대계 영국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지금 자유무역의 토대를 만든 이론이다. 쉽게 말해 세계 각국이 자신이 가장 잘하는 재화로 특화해 무역하면 모두 잘살 수 있고, 심지어 모든 분야에서 다 뛰어난 국가라도 상대적 우위의 것으로 무역하면 남는 장사라고 했다. 그렇게 세계는 1990년대부터 다자 간,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무관세 무역’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그 선봉엔 미국이 있었다. 솔직히 자유무역엔 반발이 있었고 태생적 모순이 존재했다. 반도체 잘 만드는 나라는 반도체 수출하고, 가만히 있어도 파인애플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국가는 파인애플 팔아 먹고살면 된다지만 재화마다 부가가치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 주도했기에 자유무역이 절대선인 것처럼 다들 따랐다. 패권을 갖고 휘두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렇게 자유무역을 외치던 미국이 이제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다. 지금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완전히 마지노선을 넘었다고 봐야 한다.

지난 2월 중순 미국 상무부가 꺼내든 ‘무역확장법 232조’는 정말 우리를 뜨악하게 한다. 법은 ‘특정상품이 국가 안보를 침해할 여지가 있으면 미국 대통령은 직권으로 수입을 제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특정상품에 ‘철강’이 선정됐다. 딱 보면 알겠지만 전형적인 반(反)자유무역조항에 과거 냉전시대의 유물이다. 그래서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후엔 완전 사문화됐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으로 이 무역확장법 232조를 부활시켰고 실제로 세계 철강업계에 발동될 예정이다. 이제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철강에 25% 관세가 부과될 것 같다. 이에 한국 철강업계엔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도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저이다. 트럼프는 이번 철강과 알루미늄 관세 외에도 일종의 호혜적인 ‘보복관세’를 도입하겠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30%를 매기면 우리도 30%를 매긴다는 초강수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자. 지금 미국이 취하는 초강력 무역보호주의가 ‘정말 무역흑자를 위한 것인가’하는 점이다. 정말 이렇게 무역전쟁을 펼치면 8000억 달러(약 866조 원)의 무역적자를 줄일 수 있을까. 난 절대 아니라고 본다.

예를 들어 세탁기를 보자. 세이프가드 때문에 미국 소비자들은 한국 세탁기를 20% 정도 비싸게 구입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미국산 세탁기를 살 것 같지는 않다. 이번 철강도 비슷하다. 미국 언론에선 벌써 “철강 및 알루미늄 고관세의 최대 피해는 미국 근로자가 될 것”이라고 전한다. 당장 수입 철강에 25% 관세가 붙으면 일부 미국 제조업체는 원가부담에 공장 문을 닫아야 한다. 트럼프는 이런 사실을 모르는 걸까. 정말 트럼프가 무식해서 이런 극단적인 무역전쟁에 나서는 것일까.

필자는 지금 미국이 무역전쟁을 표방한 패권전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미국은 항상 무역적자였다. 그래도 잘 먹고 잘살아왔다. 세계 원톱 국가로서 패권을 갖고 있었고 미 달러화라는 기축통화를 보유하고 있어서 그렇다. 힘들면 달러를 찍어내 사용하면 되고, 일정 시점에 풀어놓은 달러를 급격하게 회수해 신흥국가들의 부를 빼앗아가며 세계경제를 쥐락펴락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막다른 골목에 왔다. 중국과 유럽,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미국 패권은 과거의 그것이 아니다. 기축통화인 미 달러화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 지금 위기감을 느낀 큰형님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일종의 ‘집합’을 걸었다고 보인다.

벌써 각국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 중국은 칼을 갈고 있다. 패권이 걸려있기에 이번 무역전쟁의 강도는 극한으로 치달을 수 있다. 우리 정부도 단지 무역이 아니라 ‘패권’이란 또 하나의 변수를 염두에 두고 대응해야 할 것이다.

경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