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사실을 몇몇 지인에게 전했을 때 보인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파리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하고, 중남미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거지소굴(shithole)’로 비하하는 등 취임 이후 줄곧 세계 공익과 인권에 반하는 언행으로 물의를 빚어온 그가 어떻게 노벨평화상 후보가 될 수 있느냐는 거였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그냥 웃고 말았지만, ‘힘 이념(strength ideology)을 통한 평화활동’이란 추천 사유를 보면 결코 웃어 넘길 일이 아니다. 핵무기에 핵무기로 맞서는 ‘공포의 균형’이라는 미국의 세계안보정책을 대변하고 있어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 공화당 대선주자 시절인 2016년과 지난해에도 같은 사유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바 있다. 무력과 평화라는 모순이 엄연히 공존하는 게 국제 현실임을 일깨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은 해프닝으로 끝날 듯하다. 그를 후보로 추천한 이가 추천권자의 명의를 도용한 의혹이 있다고 노벨평화상을 주관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경찰에 신고해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적 사례는 110여 년 노벨평화상 역사에서 숱하다. 아돌프 히틀러가 대표적이다. 1939년 7월, 그는 스웨덴의 한 국회의원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그 두 달 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2차대전이 발발하고, 나치의 유대인 탄압도 본격화됐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지 않나 싶다. 어디 히틀러뿐인가. 무솔리니와 스탈린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1988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건 어떤가. 앞선 사례들처럼 납득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상식에 반하는 수상 사례도 적잖다. 헨리 키신저가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1973년 베트남평화협정을 이끈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300여만 명이 숨진 베트남전, 칠레 민주정부 유혈전복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독재자 지원, 동티모르 침공 지원 등 미국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며 그가 개입한 여러 전범 혐의를 떠올리면 노벨평화상에 대한 회의마저 든다. 같은 공로로 그와 함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베트남 정치인 레득토가 조국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 게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온다. 건국 과정에서 수많은 팔레스타인인을 죽게 한 메나헴 베긴,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등 이스라엘 정치인 3명의 노벨평화상 수상 역시 불합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평화상의 세계 최고 권위는 여전하다. 최근 예멘의 타우왁쿨 카르만 등 여성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1991년 이 상을 받은 미얀마의 실권자 아웅산 수치가 로힝야족 학살을 외면하거나 두둔하는 것을 강력히 비난한 건 그 권위에 기댄 행동이다. 로힝야족 난민촌을 방문한 그들이 수치에게 “각성하지 않으면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로힝야족 박해 중단을 촉구한 것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엄한 국제정치질서 속에서도 아직 노벨평화상의 순수한 정신이 살아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트럼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의 페이스북 글은 그런 전향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북미관계가 개선돼 북한은 핵 동결 조건으로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고,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핵 사찰을 받으면 트럼프는 세계적 재앙이자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게 되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대통령에 재선될 것이다.” 접점 없는 대립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북미관계에 비추어 볼 때 현실성이 부족한 이상론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진 트럼프 대통령의 처지를 생각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 그가 재선되려면 오는 11월 미 상·하원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이겨야 하는데, 반이민·보호무역정책 등 그의 ‘미국 우선주의’는 지지율 상승 효과를 못 내고 있다. 미국의 철강 수입품 관세 폭탄을 둘러싼 세계 무역전쟁 조짐에서 보듯, 지나친 보호무역은 역효과를 낼 공산이 크다. 그럴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 해결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고, 그러려면 북미가 적절한 접점을 찾아 대화로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대북특사 파견을 통한 북미대화 견인에 나선 우리 정부가 바라 마지않는 상황이다.
북핵 문제가 이처럼 평화적으로 해결된다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이 주어질 것이다. 한반도가 세계 최대 화약고로 부상한 지금까지 노벨평화상을 받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포함한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도 해내지 못한 일인 까닭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앞서 한반도는 평화를 얻게 될 터이다. 해서, 그의 수상을 진심으로 바란다. 이는 ‘역설’이 아닌 ‘정상’이다.
논설위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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