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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칼럼] 우리가 몰랐던 ‘부산의 길’

개항 역사 속에 묻힌 길, 달리 보면 새로운 지역사

부산의 풍성한 길 자산, 하나 하나가 역사콘텐츠…미래의 길은 열리고 있나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2-26 19:04:29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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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길은 무표정하다. 이쪽저쪽을 잇는 기능성에 충실할 뿐, 좀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굽은 솔이 선산 지킨다’는 말은 길에도 적용된다. 창창 뻗은 대로보다 굽은 옛길, 고갯길, 골목길이 지역사를 지키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굽은 길은 뻗은 길에 늘 치인다. 길의 역설이다.

우리는 그동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거나, ‘서울 중심’ 사고에 길들어 마을길, 지역의 길을 소홀히 여겼다. 불편한 옛길과 근대길을 버리고 바쁘게 현대길로 달려왔다. 길 위의 지역학을 챙길 틈도 없이.

1876년은 부산항이 열린 해다. 일본의 강제에 의한 개항이었다. 메이지유신으로 기세가 오른 일본은 함포를 앞세워 부산항을 열고는 부산을 수탈기지·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근대 개항과 일제 강점 36년, 해방, 6·25 전란까지 부산이 걸어온 길은 대체로 혼돈의 흑(黑)역사다. 우리 옛길이 파괴되고 신작로와 전찻길, 철길이 뚫렸고, 해로와 육로가 연결되어 만주까지 길이 트였다.

일제는 1900년 초 경부선 철길을 놓으면서 노선 아래의 영남대로(황산도)를 짓밟았다. 영남대로의 눈물은 근대의 기적 소리에 파묻혔다. 영남대로는 원형 복원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1960, 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또다시 훼손된다. 굽이굽이 한민족의 영욕과 애환이 서린 영남대로는 그렇게 사라졌다. 부산에 남은 영남대로의 자취는 몇 개의 공덕비와 대낫들이길, 공수물, 기찰 같은 지명이 고작이다. 무심한 후손들이다.

근대 개항을 전후해 뚫린 원도심의 길들은 하나하나가 지역사의 각론이다. 영선고갯길과 대청로, 광복로(장수통 거리)는 17~19세기 용두산 일원에 자리했던 초량왜관의 시공간과 거의 일치한다. 1889년 개설된 대청로는 부산 첫 신작로였고, 광복로는 일제 상업자본이 낳은 근대 번화가였다. 영선고갯길은 1900년대 전후 서양 선교사들이 다녔고, 박기종 윤상은 안희제 등 선각자들이 오가며 근대를 깨운 길이다. 1897년 박기종이 주도한 부하철도(부산역~하단 연결)는 경부선이 개설되기 전 민족자본으로 추진된 철도사업이었다.

길을 통해 근대를 읽게 되면 부산항 개항도 ‘다르게’ 보인다. 강제, 타율에 의한 일방적 개항이 자존심을 건 한판 저항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길을 지키려다 호되게 데인 조선은 서세동점의 파고 속에 ‘쇄국’의 빗장을 건다. 대원군의 심복 정현덕 동래부사는 자주·자강을 외치며 외세에 맞선다. 개항 직전 동래부는 서계(書契·외교문서)를 문제 삼아 일본의 무례를 호되게 질타했다. 왜관 담벼락에 붙인 동래부 전령서는 장려한 낙일(落日)의 자존이 실린 외침이었다. 그 역사의 현장이 영선고갯길이다. 길이 열렸지만 그 과정에서 꺾이지 않는 기세가 있었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른 이야기다. 식민 치하에서도 처절한 독립운동이 있어 자존이 지켜지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길은 지정학적·지경학적 필요와 요구의 산물이다. 당대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 상황이, 역사의 흐름이 길을 열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게 길의 본성(本性)이다. 지역학은 그 본성을 좇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부산의 길은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근현대로 이어지고, 공간적으로 육·해·공 모두 열려 있으며, 지리적으로 육로와 해로를 연결하는 결절점이고,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 관문·대양 출구라는 역할을 떠맡고 있다. 국내 어느 도시도 이러한 다양한 의미를 복합·중층적으로 품고 있는 곳은 없다. 이 점에서 부산은 ‘길의 도시’다. 부산은 지금까지 도로를 뚫고 넓히는 데 치중한 나머지 옛길을 챙기는 데엔 소홀했다. 영남대로(황산도)를 비롯해 범어사 옛길, 금정산성길, 기장 용소 옛길, 이섭교를 거치는 좌수영길, 원도심의 초량왜관길 등은 깨우면 콘텐츠가 될 자원들이다.

늦었지만 지자체들이 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이다. 중구 서구 영도구 등에서 옛길과 근대길을 도시재생 콘텐츠로 활용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원도심에 이는 ‘길 르네상스’ 바람이다. 부산시문화원연합회는 지난해 ‘부산의 길 원천 콘텐츠 발굴사업’을 벌인 데 이어 최근 관련 자료집과 창작집, 사진첩을 내고, 내달 2일 ‘부산의 길 전시회’(동구 초량동 삼진어묵 부산역 광장점)를 갖는다고 한다. 길 관련 스토리와 콘텐츠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전시회다.

하고 보니, 오늘은 조일수호조규, 즉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날이다.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부산항 개항이 결정됐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날’이 처량할 뿐이다. 개항 143년. 부산은 어떤 새로운 길을 열고 있는가.

칼럼니스트·스토리랩 수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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