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잘사는 나라의 공통 요소는 지방분권이다. 국민소득과 비례해 자치분권이 잘 이뤄져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순위 발표에서 지난해까지 9년 연속 1위를 차지한 스위스가 대표적 사례다. 스위스에서도 중북부의 주도(州都) 추크(Zug)는 자치분권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분권전문가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걸 ‘추크의 기적’이라 부른다. 가난한 마을에서 최고 부자 동네로 탈바꿈한 까닭이다.

1960년대만 해도 추크는 다른 지방의 도움을 받는 곳이었다. 인구수 5만 명에 소득은 국내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역내 기업체는 3900개 정도로 일자리 부족에 허덕였다. 그랬던 추크가 지금은 확 달라졌다. 2015년 기준으로 기업체 3만 개, 일자리 10만 개, 주민 12만 명의 도시가 됐다.

비결은 복잡하지 않다. 지방정부가 자치입법으로 법인·소득세 등의 세율을 대폭 낮추고 교육여건과 생활환경을 획기적으로 바꾼 데 있다. 그러자 국내외 기업체들이 몰려들면서 지역 경제가 황금기를 맞았다.

추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명하다. 지역에 관한 일을 지방정부가 주도하고 중앙정부는 지원 역할만 한다는 사실이다. 지역이 자생력에 필요한 법률을 직접 만들어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그 요체다. 스위스에서는 지방정부가 주민투표로 세율을 자체 결정할 수 있는 구조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정반대다. 작은 사안까지 중앙정부의 허가나 승인을 받아야 된다. 중앙집권체제의 사슬에 지역의 손발이 묶여 있는 꼴이다.

해양수도를 지향하는 부산만 봐도 그런 케이스는 차고 넘친다. 각종 법적 권한이 해양수산부에 있으니, 유람선 한 척 마음대로 띄울 수 없다. 해양관광이나 항만개발·수산관련 정책을 부산시 주도로 펼친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다른 광역단체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산업재해와 노동안전보건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려다 상위 법률과의 충돌 문제로 무산됐다. 지역 실정에 맞게 복지시책을 추진하려 해도 중앙부처의 간섭을 받는 게 우리의 현주소다.

자치분권 개헌이 절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아직도 자치분권 개헌에 딴지를 걸려는 움직임이니 기가 찬다. ‘개헌 없이 지방분권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은 완벽한 거짓말’이라는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의 주장이 그것이다. 그들은 법령 개정만으로도 지방분권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논리다. 대통령이 결심해 중앙정부의 600여 사무를 지방에 이양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니 개헌은 필요치 않다는 얘기다.

한국당의 이런 주장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않는 것과 매한가지다. 현행 헌법에 두 개뿐인 지방자치 조항을 보자. 지자체는 법령의 범위 안에서 자치규정을 제정할 수 있도록 못 박고 있다. 이는 중앙정부의 법령이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하라는 뜻이다. 지역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중앙이 시키는 일만 하라는 것과 진배 없다. 한국당의 말처럼 법령 개정만으로 지방분권이 된다면, 그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뭘 했는지 묻고 싶다.

단순히 법령 개정 수준에 국한해서는 진정한 자치분권을 실현하기 어렵다. 지방정부에 법률 제정권과 과세권, 조직권 등을 헌법으로 보장해야 지역이 중앙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서도 중앙 권력구조(정부 형태) 개편에만 함몰되어서는 정파 간 권력 나눠먹기로 흐르기 십상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없애야 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중앙과 지방의 권력분점이다. 지방에 결정권을 돌려주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수도권 초집중화와 지역 불균형 심화, 지역주의 문제는 고도의 중앙집권체제와 권위주의 정권의 편향된 권력행사에서 비롯됐다. 이런 병폐를 고치기 위해서는 중앙·지방정부 간 기능과 역할을 제로베이스에서 재점검해 지방분권체제로 전면 혁신하는 게 필요하다. 그와 병행해 공공기관 지방이전을 필두로 강력한 지방분산 정책이 시행돼야 하겠다. 우리나라가 오랜 기간 중진국에 머물러 있는 것도 수도권 일극 중심의 불균형 발전에 치중해 지역의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한 요인이 강하다.

이제는 지방의 손발을 묶어놓은 족쇄를 풀어야 한다. 지방정부가 지역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헌법을 바꾸는 것이다. 중앙이 쥔 사무를 넘겨주는 방식만으로 자치분권을 이룰 수 있다는 건, 지방을 하급기관으로 여기고 중앙기관의 통제 아래 계속 두겠다는 발상과 다르지 않다. 스위스는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의 절반에 못 미치고 인구 수는 820만 명으로 우리의 6분의 1 수준이다. 그럼에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지방분권을 시행하는 국가다. 추크의 기적은 스위스 얘기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기적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논설위원 ksyou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