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할 때에 위기를 생각하고, 여기에 대한 대비태세가 되어 있으면 근심이 사라지게 된다는 뜻의 ‘유비무환’이라는 말은 너무 자주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힐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 사자성어는 으레 큰 사고가 나거나 재난이 생겨 인재(人災)임을 따질 때 어김없이 등장하곤 한다. 모든 일이 순조롭더라도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가장 나쁜 상황을 상정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무슨 일을 당하고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난 연말연시에는 날씨가 추웠던 탓인지 유독 화재로 인한 큰 사고가 잦았다. 특히 밀양에서 생긴 화재는 병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 여러모로 생각하는 바가 많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들은 신체적으로 약하고,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재난이 발생하면 이동하기가 쉽지 않다. 활동이 정상적인 직원들도 환자를 동반해서 함께 대피해야 하므로 이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병원은 어쩌다가 생길지도 모를, 위험한 사태에 대비해서 평소에 준비를 한다. 어느 병원이고 다 그렇겠지만 대형병원의 경우에는 매년 소방당국과 합동으로 훈련도 하고 점검도 철저하게 받는다.

우리는 예전부터 여러 가지 훈련을 많이 받았다. 필자 역시 초중고를 다니면서 다양한 이름의 훈련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훈련을 할 때마다 실제상황을 마주하는 느낌으로 하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반문하게 된다. 연습이긴 하지만 정말 급박한 일이 내 눈앞에서 지금 일어난 것처럼 해야 할 텐데 마지못해 건성으로 한다면 아예 안 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연중에 훈련은 연습이니까 형식적으로 적당히 하면 되겠지 하는 식으로 해온 건 아닐까 반성하기도 한다. ‘연습을 실전같이’란 말이 있듯이 평소에 철두철미하게 훈련해야만 그것이 몸에 배어서 유사시에도 조건반사처럼 즉각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비단 재난과 관련한 문제만은 아니겠지만 일이 닥쳤을 때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경우라면 나라는 나라대로,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또 단위기관들은 나름대로 잘 만들어진 행동지침이나 요령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매뉴얼은 이 방면에 조예가 있고, 평소에 열심히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손에서 나온다. 따라서 미리 전문가들을 잘 양성하고,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지진 때문에 부산이 흔들려도, 가까운 포항에서 몇 차례나 여진이 계속돼도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전문가가 없어서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다.

최근에 병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이슈는 ‘환자의 안전’이다. 진단과 치료의 모든 과정에서 환자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사고나 부작용 없이 완전하게 회복하는 과정을 지향한다. 병원을 그냥 아픈 사람을 돌보는 곳으로 생각하면 그만이겠지만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한 조직과 시설, 장비를 갖추고 있는 곳이어서 항상 문제가 생길 소지를 안고 있다. 여러 단계의 절차나 과정에서 생기는 잘못을 완벽하게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이는 아무리 지나쳐도 모자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제는 환자 개인의 안전뿐만 아니라 병원 건물의 안전에도 관심을 가져야만 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연수를 다녀온 우리 병원의 의사에게서 미국 병원의 재난대피훈련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곳에서는 크든 작든 매주 환자를 위한 모의훈련을 하며, 다른 병원들도 대개 비슷하다고 한다. 사실 1년에 한 번도 번거로운데 자주 한다고 해서 처음엔 많이 놀랐지만 이거야말로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가 아파서 치료받으러 온 병원에서 재난 때문에 희생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곧장 회의를 열어서 소방점검, 화재진압과 환자 대피훈련을 빨리 다시 하자고 직원들과 의논하였다. 훈련의 횟수가 많아지고, 더 많은 수고와 노력이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늦출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환자의 안전이라면 누가 뭐래도 병원에 몸담은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앞에 닥친 일처럼.

해운대백병원 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