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졸부에의 환상’을 심어 정권을 잡은 사람이 아닌가. ‘747공약’인지 뭔지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며 국민에게 사탕발림을 하지 않았던가. ‘다스 주가조작’ ‘4대강’ ‘자원 외교’ ‘제2 롯데월드 인허가’ 등 국민이 내막을 알고 싶어 하는 MB 시대의 현안이 숱하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악의 평범성’을 부추긴 자라면, 이명박은 ‘한탕주의의 평범성’을 들쑤신 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근혜의 비극은 식견과 판단력이 모자란 사람이 분수에 넘친 권력을 쥔 데서 비롯됐다면, 이명박의 적폐는 국가를 사익을 위해 요리한 자가 나라의 채를 쥔데서 시작된 게 아닐까. 아마도 ‘1987체제’의 근본 모순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지난주 ‘1987’이란 영화를 아들과 함께 뒤늦게 보러 갔다. 그 시절 대학생이라면 누군들 안 그랬으랴만, 나 역시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마시며 거리를 내달렸던 ‘아스팔트 킨트’였다. 박종철이나 이한열은 내겐 5, 6년 후배 세대다. 그 영화의 내용을 새삼 떠드는 건 우스운 노릇이겠지만, 그래도 그중의 한 대목은 마음의 밑바닥에 앙금처럼 가라앉았다.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더라는 거짓말로 사건을 덮으려다가 실패한 전두환 정권은 결국 고문에 가담했던 경찰관 중에서 둘을 골라내 구속한다. 영화에서 잘 묘사된 대로 대공처장 박처원은 그들을 달래고 으른다. “너희들은 빨갱이를 때려잡는 애국자이니 떳떳하게 감방에 다녀오라”라고. 두 사람은 “받들겠습니다!”를 복창한다. 그러다가 자기네만 고문치사의 주범으로 몰려 기약 없는 감방생활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그들이 진상을 폭로하겠다고 하자 정권은 거액을 주겠다며 회유한다. 그것도 통하지 않자 폭력까지 동원하고 결국엔 “처자식들을 임진강에 빠트려 죽이고 월북 시도를 하다 죽었다”고 발표하겠다고 협박해 굴복시킨다.

그 장면을 보면서 ‘악의 평범성’이란 한나 아렌트의 유명한 말을 떠올렸다. 처자식을 건사하는 일에는 누구와 다름없이 평범한 가장인 그들이 어째서 무고한 학생을 붙잡아다 물고문해서 죽일 때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담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아렌트는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 것을 ‘악의 평범성’이란 말로 압축했다. 평범한 경찰관이 아무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도록 몰아가는 것, 그리고 들통이 나자 엊그제까지 동료였던 부하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고 온갖 비열한 짓을 마다치 않는 것. 그게 바로 사악한 권력의 민낯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겨우 30년 전에 그런 세월을 살았던 거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나는 좀 복잡한 심사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런 비인간적인 세상을 바꾸기 위해 지난 30년 동안 분투해 왔다. ‘6·10 항쟁’이나 ‘촛불 집회’가 대표적 사건이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바꾸어 왔다. 적어도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붙잡혀 가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하는 일은 없어졌다. 대통령직선제를 도입해 5년마다 정권을 바꾸기도 한 터다. 먹고살기 팍팍해도 경제지표로는 성장을 거듭했다. 그런데도 세상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30년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헛헛한 느낌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직 대통령이 구속돼 단죄를 받고, 하수인들이 줄줄이 오랏줄을 차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묵은 필름이 5년 단위로 다시 돌아가는 듯한 기시감이 생긴다. 지난 30년간 우리가 진실로 바꾼 게 도대체 뭔지 회의감을 떨칠 수 없는 거다.

아들에게 영화를 본 소감을 물었다. “때로는 눈물이 나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어서 실감으로 느껴지지는 않던데요.” 나는 수긍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비트코인’ 이야기도 나왔다. 왜 20대가 그렇게 비트코인에 열광하느냐고 묻자 아들 녀석의 대답인즉슨 이랬다. “제 친구 중엔 돈까지 빌려 몽땅 쓸어 넣은 애도 많아요. 그게 ‘흙수저’를 벗어날 마지막 기회라고들 생각하니까요.” 나는 그게 얼마나 신기루처럼 허황한 현상인지 일장 설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똑똑하고 영악한 요즘 청년들이 ‘암호화폐’의 본질을 몰라서 투기 열풍에 빠진 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야지, 그런 노름에 빠져선 못 쓴다”고 설교해 봐야 ‘꼰대’ 소리나 듣기 십상이 아니겠나.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바로 그 얼굴을 며칠 후 TV 생중계로 지켜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이런 성명서를 읽었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검찰수사에 대하여 많은 국민이 보수를 궤멸시키려는 정치 공작이자,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보고 있다.”

그때 나는 또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본 장면이 아닌가. 1995년 김영삼이 ‘과거사 바로 세우기’를 내걸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내란죄로 다스리려고 할 때 전두환이 연희동 집 골목에서 항의 성명문을 읽던 장면 말이다. 23년 만에 똑같은 장면이 재현된 셈이니 이걸 역사의 희극이라 해야 할지 비극이라 해야 할지. 조폭 두목처럼 옛 부하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선 “나에 대한 공격은 노무현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 운운하는 이명박을 지켜보자니 ‘적반하장’ ‘후안무치’ 같은 과격한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반질반질한 그의 이마를 바라볼 때 또 하나의 영상이 오버랩 되는 것이었다. 2009년 1월 20일 서울 용산. 5층 건물 위의 컨테이너 망루가 정월 대보름 달집처럼 시뻘겋게 불에 타오르면서 도심엔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물대포가 분수처럼 치솟고, 경찰특공대가 무차별로 진압봉을 휘두르고, 농성자가 화염병을 던지고…. 경찰의 강제 진압과 철거민들의 저항이 아비규환을 일으킨 그 날 다섯 명의 철거민과 한 명의 경찰이 불에 타 죽었다.

총사업비 31조 원을 들여 56만여 ㎡의 부지에 67개의 초고층 상업·문화·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선 ‘한국판 두바이’를 만들겠다며 재벌기업을 불러들였던 이들은 이명박과 오세훈이다. “맨손으론 못 쫓겨나겠다”고 절규하던 세입자를 용역 깡패를 동원해 몽둥이질한 끝에 발생한 참사가 아니었던가. 어떻게 국가가 국민의 탐욕을 부추기는가. 어떻게 국가가 부동산 투기의 바람잡이가 될 수 있는가. 빈손으로 쫓겨나지는 못하겠다고 몸부림치는 국민에게 어떻게 국가가 몽둥이를 휘두르는가. 지금도 풀지 못한 의문이다.

그 한탕주의의 신기루는 결국은 천문학적 빚만 남긴 채 좌초했다. 그때도 약삭빠른 투기 재벌은 얼른 발을 뺐다. 나는 앞서 ‘악의 평범성’이란 단어를 들먹였지만, 이명박을 생각할 때마다 ‘물신주의의 평범성’이란 내 식의 조어가 떠오른다. 이명박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졸부에의 환상’을 심어 정권을 잡은 사람이 아닌가. ‘747공약’인지 뭔지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며 국민에게 사탕발림을 하지 않았던가. ‘BBK 주가조작’ ‘4대강’ ‘자원 외교’ ‘제2 롯데월드 인허가’ 등 국민이 내막을 알고 싶어 하는 MB 시대의 현안이 숱하다. 내 개인적으로는 ‘용산 참사’가 가장 먼저 규명되고, 가장 엄격히 책임을 물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 시대의 ‘부자 되기’ 신기루는 지금 ‘비트코인’으로 이어지고 있지 않나. 수백만 명 ‘흙수저’의 돈을 털어 몇 사람의 ‘흙수저’에게 일확천금을 안겨 준다는 게임의 규칙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뜯어보면 돈을 챙기는 그 소수도 사실은 ‘흙수저’를 부추기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악의 평범성’을 부추긴 자라면, 이명박은 ‘한탕주의의 평범성’을 들쑤신 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근혜의 비극은 식견과 판단력이 모자란 사람이 분수에 넘친 권력을 쥔 데서 비롯됐다면, 이명박의 적폐는 국가를 사익을 위해 요리한 자가 나라의 채를 쥔데서 시작된 게 아닐까. 아마도 ‘1987체제’의 근본 모순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결됐다는 착각 속에서 ‘박근혜의 국정농단’이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었고, 전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이명박식 사탕발림이 헛된 물신숭배로 이끌었지 않았을까.

문재인 정부는 개헌에 나서고 있고, 정치개입과 권력형 비리의 숙주가 된 ‘국가정보원’을 개혁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법 조항 몇 개를 바꾸거나 권력 기구를 개편하는 것, 죄지은 자를 잡아넣는 것으로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권력 쥔 사람들의 생각이 근본에서 바뀌는 거다. 앞 정권의 죄상을 단죄할 때 5년 후, 10년 후 자신의 운명을 떠올려라.

나는 이명박 시대의 과오가 충분히 밝혀지고 그 허물에 상응하는 처벌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명박 시대’의 진정한 청산은 그들이 뿌려 놓은 헛된 물신주의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데서 완결된다고 믿는다. 이명박판 물신주의는 아직도 살아 있다.

소설가·경성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