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을 가득 채웠다. 그동안 모나미 볼펜 하나로 충분했는데 말이다. 가방에 한 자루씩 넣어 다니는 걸로도 회의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메모하는 건 어려움이 없었다.

이따금 가방에 볼펜 한 자루가 텅텅 소리를 내며 굴러다니는 걸 떠올리면, 부끄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내가 끄적이는 것들이 어디서나 구할 수 있어 평생 귀한 대접을 못 받는 거라 느껴졌다. 그래도 언제든 볼펜을 잡을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문방구에서 볼펜만 4만 원어치를 샀다. 큰마음 먹고 고른 거였지만, 카드를 꺼내기 전 몇 자루는 뺄까 생각했다. 그래도 겨울 하늘처럼 맑은 파란색, 생강차가 우러난 듯한 연한 노란색은 이미 바구니에 담지도 못한 터라 물러설 순 없었다. 그렇게 12자루의 볼펜은 내 차지가 됐다. 서랍 속에서 필통을 찾아 차곡차곡 펜을 넣었다.

미술관을 다녀온 뒤였다. 전시회 포스터의 그림은 누구나 한 번쯤 본 거라 눈에 익었지만, 화가의 이름은 처음 발음해보는 거였다. 꼭 보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마침 미술관 근처를 지날 일이 있었고, 두 시간 남짓 시간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국의 화가는 97년의 생을 살다 갔고, 전시회는 그림이 그려진 순서대로 꾸며져 있었다. 20대 청년 때 미술을 시작한 그의 그림은 온통 거칠고 어두웠다가, 차츰 단정한 선과 밝고 선명한 색으로 자리 잡았다.

그가 처음 미술계에 이름을 알린 건 검은 빛으로 가득한 그림 한 점 때문이다. 제목은 ‘열차’이고, 뒤에 괄호를 표기하고 ‘차에 치여 죽음’이라는 말이 마저 붙는다. 기차선로에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성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 그림의 시작이었다. 화가는 어둠 속에 쓰러진 그녀를 화폭에 담는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는 커다란 캔버스에는 온통 어두운 색뿐이라 형체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희미한 빛으로 그녀의 존재가 그려져 있다.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누워있는 100년 전의 그녀를 알아볼 수 있다. 관객은 그림 앞에 서 있는 동안 그녀의 죽음을 위로하러 온 조문객이 된다.

‘열차’ 이후, 그는 평생을 거쳐 ‘가로등이 속눈썹에 닿아 생기는 동그란 빛’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속눈썹 아래에도 작은 그림자가 생긴다는 걸, 어둠 속에서도 사물은 윤곽선마다 붉은빛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화풍은 거친 선과 어둠은 사라지고, 선명한 색과 붉은 윤곽선으로 완성된다.

그의 삶에는 여러 이별이 다가온다. 누구보다 아꼈던 아내를 일찍 여의고, 딸도 어린 나이에 먼저 떠나보낸다. 하지만 수천 점의 그림 중 아픔 때문에 거친 선이 그대로 드러난 건 손에 꼽을 정도다.

바스락거리는 마음을 가졌을 때도 화가는 푸른 바다를 표현하고, 움직이기 어려워 집 안에만 있을 때도 고양이의 천하태평한 표정을 그린다. 그의 후기 대표작에는 편안하게 낮잠을 자는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사실은 앞이 보이지 않는 고양이이다. 그래도 표정은 한가롭기만 하다.

“살아 있고 싶어요. 저는 좀생이라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목숨이 아깝습니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멋있겠지만, 아쉽게도 아까워요.”

화가는 96세의 나이에도 간절히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에게 삶은 기쁨이었다. 작은 것에도 그림자가 생기고, 어둠에도 빛이 있다는 진리를 알게 된 뒤 소중한 세계를 기쁘게 표현하는 데 열중해왔다. 상실의 슬픔을 간직하고도, 삶의 순간마다 즐거움을 발견하며 삶의 동력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기쁨을 나눠준 한 사람이 있어 오랫동안 우리가 행복할 수 있었다.

미술관을 나섰다. 눈앞의 풍경마다 붉은 윤곽선이 그려지는 듯하다. 새끼 오리는 살얼음이 낀 강물에서도 기꺼이 잠수해 먹이를 찾고, 갈매기 떼는 파도를 맞으면서도 바다 위에 내려앉아 잠을 잔다. 기쁨의 윤곽선이다.

새로 산 볼펜으로 여러 개의 선을 그렸다. 그가 이름 모를 사람의 죽음을 그림으로 애도한 것처럼 나도 이 세상 누군가의 슬픔을 기억하고 싶다. 사람들이 오래오래 기뻤으면 좋겠다. 화가의 이름은 쿠미가와 모리가즈이다.

미디토리 협동조합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