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불구 돈세무민(獨立不懼 遯世無悶)’. 홀로 서도 두려워 않으며, 세상과 멀어졌어도 근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주역의 택풍대과괘(澤風大過卦), 앞으로 가자니 강이 막고 뒤에서는 태풍이 몰아칠 때의 처세훈입니다. 힘센 무리가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지만 이것을 견제할 군주와 신하의 힘이 부족한 때를 말한다고도 합니다.

지방선거를 치르느라고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가 거리를 울릴 테고 개헌을 둘러싸고 여야 간에 눈치싸움, 힘겨룸이 또 벌어질 겁니다. 하지만 주역이 가르친 대로 중용을 지켜 적극적으로 위난에 대처하면 올 한 해 우리나라에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짐짓 희망을 가져보는 새해 아침입니다.

2018년 첫날 신새벽을 해운대나 간절곶에서 맞은 분도 많았을 테지만 저는 전남 완도의 다도해일출공원에서 해맞이를 했습니다. 2017년의 마지막 일몰은 청산도에서 완도로 가는 배 위에서 지켜봤더랬습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습니다. 검푸른 바다의 살갗엔 오소소 소름이 나있었는데요, 깊이를 알 수 없이 출렁거리는 그 바다의 아득한 해저가 무서웠습니다. 배의 난간에 기대서서 푸르스름한 이내 속으로 긴 꼬리를 늘어뜨리며 사위어가는 석양을 저는 오래 지켜보았습니다.

제가 두렵다고 느낀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전날, 진도 팽목항을 들렀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남도기행의 첫 번째 행선지로 팽목항을 작정했던 것은 ‘세월호’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세월호를 화두 삼아 이런저런 글을 썼으면서도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정작 그곳을 한 번도 찾지 못했던 게 늘 마음에 걸렸던 게지요. 선체가 이미 인양돼 목포로 옮겨졌고 보면 그곳은 찾는 이 드문 쓸쓸한 포구로 방치돼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과는 달리 그곳엔 많은 이가 있었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억 음악회가 방파제 끝자락에서 열리고 있었던 겁니다. 앳된 얼굴의 가수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춤패가 진혼굿판도 벌였습니다. 저는 100명쯤 되는 관객에 섞여 그들의 공연을 지켜봤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지 3년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군가는 죽은 이들을 잊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기억 음악회’를 열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그들을 잊지 않고 바람 부는 포구를 찾아오고 있었던 겁니다.

공연이 끝날 무렵 사회자가 갑자기 저를 불러냈습니다. 공연 내내 박수를 크게 치는 관객이었던 제가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나 봅니다. 그리고는 팽목항을 찾은 소감을 한마디 하라지 뭡니까. 얼떨결에 몇 마디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겼습니다. “부산에서 온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세월호’ 이야기를 소재로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도 이곳을 한 번도 와 보지 못해 늘 미안하게 생각하다가 뒤늦게야 찾아왔다.” 간이 객석의 맨 앞줄에 앉은 유족 아주머니들이 저의 즉흥 고백(?)에 따뜻한 박수를 보내줘서 더욱 민망했더랬지요. 그 아주머니 중의 한 분이 제게 다가와 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유, 부산에서까지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가 오늘 오신 분들을 위해 따뜻한 떡국을 끓여놓았으니 꼭 드시고 가세요.”

저는 떡국을 먹으러 가는 대신 노란 리본이 새겨진 빨간 등대 옆에서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저 어디쯤에서 배가 뒤집혀 가라앉았을 것이고 숱한 생명이 속수무책으로 잠겼겠거니 하는 생각에 그 검은 바다가 새삼 무서워지더군요. 제가 한 해의 막바지에 그 방파제를 찾았던 건 야만적인 시대와의 작별의례를 치르겠다는 저 혼자만의 생각이 무의식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비로소 들었습니다.

시원찮은 제 소설의 주인공은 시신조차 건져지지 못하고 세월호의 선창에 갇혀 있던 두 사람의 여학생입니다. 갇힌 지 2년 만에 물살을 따라 배 바깥으로 나오게 된 그들은 손을 꼭 잡고 멀리 남쪽 바다로 떠내려갑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되살릴, 그리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어른들의 죄를 구할 ‘생명수’를 찾으러 나선 여행길이지요. 저는 그때 그 아이들을 무가 속의 ‘바리데기’에 빗댔습니다. 바리공주는 자식을 버린 부모의 죄를 대속해 칼산지옥 불산지옥 독사지옥 한빙지옥을 건너 무장승에게 3년을 물 길어 주고, 3년을 나무해 주고, 3년을 밥 해주고 아들 일곱을 낳아주고서야 부모를 살릴 생명수를 얻어왔다지요. 글쎄, 소설 속일망정 자기네를 버린 우리 어른들을 구원할 생명수를 얻어오라고 시켰으니 하고 보면 저도 뻔뻔했다 싶기도 하군요. 팽목항 컴컴한 바다 위엔 물새 떼가 곤두박질치듯 수면 위를 낮게 선회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그 아이들의 영혼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새해의 희망을 노래해야 할 자리에 묵은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졌는데요, 어쩌다 보니 진도 청산도 등 섬으로 이어진 저의 짧은 남도 기행은 완도의 해맞이로 이어졌습니다. 전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에 섞여 저는 다도해 한가운데서 솟아오르는 붉은 해를 지켜보았습니다. 점점이 놓인 섬의 숲을 헤치고 이글이글 발갛게 상기된 어린 해가 떠오르자 주위에 섰던 사람들이 “와!” 함성을 지르더군요. 그들 모두가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 저마다의 소원을 빌었겠습니다만, 그때 저는 무엇을 빌었을까요. 무어 대단한 소망이야 있었겠습니까. 나이가 들면 허황한 욕심도 시나브로 사라지는 법이라 저와 가족들이 무탈하게 또 한 해를 열심히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쯤이야 가졌겠습니다만.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한다면, 내가 발 디디고 사는 ‘지금-여기(hic et nunc)’의 세상이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안녕하고, 좀 더 영성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곁들였을 겁니다.

아, 그때 이런 옛글 한 토막이 떠올랐던 건 기억납니다. ‘독립불구 돈세무민(獨立不懼 遯世無悶)’. 홀로 서도 두려워 않으며, 세상과 멀어졌어도 근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임금의 노여움을 사 원지로 유배 간 조선 선비들은 이 구절을 읽고 또 읽으며 위안으로 삼았다지요. 진도나 완도가 예전엔 유배지여서 그런 구절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제가 좋아하는 경구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주역의 택풍대과괘(澤風大過卦), 앞으로 가자니 강이 막고 뒤에서는 태풍이 몰아칠 때의 처세훈입니다. 바람을 뜻하는 손(巽)괘 위에 연못을 의미하는 태(兌)괘가 얹혀 있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풍랑이 일지 않겠습니까. 큰 것이 지나쳐서 균형이 잡히지 않은 형상을 뜻하기도 한다지요. 힘센 무리가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지만 이것을 견제할 군주와 신하의 힘이 부족한 때를 말한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주역은 중용을 지켜 적극적으로 위난에 대처하면 안정될 것이라고 이 괘의 의미를 풀이합니다.

어쩌면, 올해 무술년(戊戌年)에 맞는 괘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그랬던 적이 언제 있었겠습니까만, 다가오는 시간에도 우리네 발밑엔 크고 작은 풍파가 들이칠 터입니다.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위한 협상으로 남북대화가 모처럼 재개될 기미를 보이고는 있지만, 북한의 핵 도발이 불러일으킨 국제정치의 파고는 올 한 해에도 우리에겐 힘겨운 도전을 강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한 해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서툰 요리사가 어질러 놓은 부엌을 설거지하느라고 요란했습니다만, 올해 들어서서도 당분간 파열음이 그치지 않겠지요. 경제를 안정시키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확충도 정부가 팔을 걷어붙여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지난 연말 제천 화재 참사가 여실히 보여주었던 대로 아직도 우리 사회가 ‘세월호’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게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아, 지방선거를 치르느라고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가 거리를 울릴 테고 개헌을 둘러싸고 여야 간에 눈치싸움, 힘겨룸이 또 벌어질 겁니다.

그렇게 보면, 앞으로 가고는 싶은데 강이 막고, 뒤에선 바람이 몰아치는 형국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주역이 가르친 대로 중용을 지켜 적극적으로 위난에 대처하면 올 한 해 우리나라에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짐짓 희망을 가져보는 새해 아침입니다. 큰 나라의 눈치를 너무 보지 말고, 너무 서두르지도 말며 차분히 때를 기다려 차근차근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가 필요할 때란 생각이 듭니다. 어디 대통령이나 정부만 그렇겠습니까. 저 같은 장삼이사를 포함해 국민 모두가 그런 지혜를 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잘나간다고 너무 좋아할 일이 아니며 어렵다고 너무 절망할 일도 아니다’. 이것이 주역을 꿰뚫는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삼가면서도 정성을 다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세상, 더 평화로운 세상이 올 수 있겠지요. 그런 소망으로 올 한 해를 열어 봅니다. 조금 늦었지만 모든 분께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근하신년!

소설가·경성대 교수